하이트진로가 2020년 4월 출시한 ‘진로이즈백’. 1970·80년대 출시됐던 진로 소주병 디자인을 복원했다. [하이트진로 제공]
바야흐로 송년회의 계절이다. 송년회에는 술이 빠지기가 쉽지 않고, 한국 사회에서 술이라면 소주가 빠질 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소주를 많이 마신다. 지난 9월 20일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이 최근 5년간 주류 품목별 반출량 및 수입량 자료를 국세청에서 받아 분석했다. 2021년 국내 제조장에서 반출된 소주량은 82만5,848㎘, 360ml들이 병 기준으로 22.9억 병이다. 재고 회전이 빠른 주류 특성을 감안하면 국내 제조장에서 출고된 반출량은 소비량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결국 성인 1인당 평균 52.9병을 마신 셈이다.
■소주의 기원과 증류식 소주
소주는 대체 언제부터 우리의 여흥에 좋든 싫든 빠질 수 없는 술로 굳게 자리를 잡은 걸까? 어떤 소주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엿가락처럼 늘어날 수 있다. 원조 소주인 증류식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과일의 당도가 높지 않았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곡물로 술을 담갔다. 익힌 곡물에 누룩과 물을 더하면 전분이 당으로 변해 미생물의 먹이 역할을 하고, 미생물은 신진대사를 통해 알코올을 생성한다. 이 과정이 발효이며 결과물이 술이다. 쌀로 지은 밥으로 술을 담가 거르면 막걸리가 되고, 여기에 싸리 등으로 만든 긴 통을 박아 맑은 술을 떠내면 청주(淸酒)가 된다. 온도차를 활용해 청주를 증류하면 소주(燒酒)가 된다.
증류식 소주는 고려 충렬왕 때 몽골군을 통해 유입되었다. 그래서 몽골군의 주둔지였던 안동과 개성, 제주도는 소주의 제조법이 유독 발달했다. 조선시대의 소주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단종실록’에는 문종 승하 후 상주였던 단종이 허약해지자 대신들이 소주로 기운을 북돋았다는 기록이 있다. 1614년 이수광이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에는 ‘소주는 약으로 쓰기 때문에 많이 마시지 않고 작은 잔에 마셨고, 따라서 작은 잔을 소주잔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이 즐겨 마시기는 했지만 증류식 소주는 상류계층의 술이었다.
■희석식 소주의 시대
오늘날 소주의 대세라 할 수 있는 희석식 소주는 일제강점기에 도입되었다. 희석식 소주는 명칭처럼 알코올에 물을 타 희석시켜 만든다. 옥수수, 수수, 고구마, 타피오카 등의 재료를 발효시킨 다음 연속 증류해 순도 95% 이상의 주정을 생산한다. 그리고 물에 희석시켜 도수를 낮춘 뒤 에탄올 특유의 냄새를 줄이는 탈취 공정을 거친다. 여기에 액상과당이나 스테비오사이드 같은 감미료를 첨가해 맛을 조정한 뒤 한 번 더 여과시켜 병입하면 소주가 완성된다.
1919년 최초로 평양과 인천, 부산에 알코올식 기계소주공장이 세워져 재래식의 누룩을 활용한 소주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희석식 소주의 소비는 전통적인 가양주(家釀酒, 집에서 빚는 술)문화의 붕괴와 맞물려 증가했다. 일제가 1916년 주세령을 시행해 가양주 양조를 전면 금지했고 주류 시장을 강력하게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희석식 소주가 바로 증류식 소주를 압도하지는 못했고 둘의 공존이 오랜 세월 이어졌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많은 공장들이 폐업했고 희석식 소주는 별다른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희석식 소주가 1965년 박정희 정부가 개정한 양곡관리법 덕분에 ‘국민의 술’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쌀을 활용한 소주와 막걸리 양조가 전면 금지되고 그 빈자리를 희석식 소주가 채웠다. 쌀 공급의 부족이 명분이었다. ‘보릿고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당시 한국의 전반적인 농업 생산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쌀의 만성 부족이 양곡관리법 개정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희석식 소주의 대중화 뒤에는 저임금 노동력에 기반한 산업화가 있었다. 저임금을 유지하려면 쌀값을 낮게 묶어 두어야 했으니, 이른바 저임금 저곡가 정책이 펼쳐졌다. 1960년대 한국의 산업화는 농촌을 수탈해 값싼 식량을 노동자들에게 공급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임금의 대부분을 쌀과 연탄 구입에 사용했기 때문에 물가의 핵심인 쌀의 가격을 낮게 유지하면 그만큼 임금도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쌀이 많이 소요되는 증류식 소주를 빚으면 수요가 증가하니 결국 가격 또한 오를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따라서 증류식 소주의 존재는 쌀값을 낮게 유지하려던 박정희 정부의 의도에 정면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증류식 소주와 쌀 막걸리 양조를 금지시키고 희석식 소주를 보급해 쌀 가격 안정화를 도모했다. 그 결과 희석식 소주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주머니 사정에 구애받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술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1974년을 기준으로 맥주는 한 병에 238원이었지만 소주는 100원이었으니 후자를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곧 희석식 소주에 ‘서민의 친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한편 희석식 소주의 대중화에는 산업화 시기의 보호무역 정책도 기여했다. 1984년 맥주 수입개방이 이뤄지기 전까지 한국 주류업체들은 국내 시장을 경쟁 없이 장악하고 있었다. 1970년대 및 1980년대의 한국 주류 시장은 소주가 주를 이뤘지만 맥주 소비가 조금씩 늘어나던 상황이었다. 선택의 폭이랄 게 없었으니, 소비자는 있는 술에 입맛을 길들이게 되었고 소주는 친숙한 술이 되어 버렸다.
승승장구해온 희석식 소주의 위상이 1990년대 들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77년 쌀의 자급을 이룬 이후 쌀 생산량은 1988년 605만 톤으로 정점을 찍었다. 반면 쌀 소비량은 1979년을 기점으로 꾸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쌀이 풍족한 시대에 증류식 소주의 양조를 금지할 이유는 없었다. 1991년부터 암묵적으로, 1995년부터는 양곡관리법의 개정으로 공식적으로 허용돼 1965년 주류 시장에서 퇴장당했던 증류식 소주가 등장할 수 있었다. 증류식 소주의 출고량은 2005년 406㎘에서 2010년 717㎘, 2017년에는 1,203㎘로 꾸준히 상승 중이다.
■희석식 소주의 대명사 진로
희석식 소주의 대명사 진로는 1924년 10월 평남 용강에서 진천양조상회로 출범했다. 초창기에는 원숭이가 상징이었지만 신길동으로 자리를 옮겨 전국으로 영업을 개시하면서 두꺼비로 바뀌었다. 우수한 품질과 판매전략 덕분에 1965년 희석식 소주의 대중화와 함께 주류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했다. 제조기술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밀림의 바 작전’, ‘왕관회수 작전’ 등 기발한 판촉활동을 펼치면서 국내시장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잘 알려졌듯 소주의 도수는 갈수록 낮아져왔다. 1924년 첫 출시 당시 진로소주의 도수는 35도였지만 이후 1965년 30도, 1973년에 25도로 차츰 낮아졌다. 양곡관리법으로 인해 희석식 소주가 대량생산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이후 30년 동안 사랑받았던 25도 소주의 벽은 1998년 23도의 참이슬 출시로 깨졌다. 출시 한 달 만에 누적 판매량 200억 병을 돌파하며 소주 역사상 최고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후에도 소주의 도수는 꾸준히 낮아져, 현재는 15.9도의 제품까지 출시되어 있다. 이와 맞물려 우리는 정말 소주를 많이 마셨으니, 소주병을 누인 길이(21.5㎝)로 연결하면 서울~부산(428㎞)을 약 6,832회 왕복할 수 있고 지구둘레를 146회 감쌀 수 있다.
■소주의 미래
앞으로도 희석식 소주가 권세를 계속 누릴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소비량은 압도적이지만 사실 2021년과 비교할 때 2022년의 소비량은 12.7% 감소했다. 게다가 주류의 소비추세가 저도수 및 고급화와 맞물리면서 와인이 입지를 계속 넓혀가고 있기에 희석식 소주의 소비량은 계속 줄어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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