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박자박 소웁탐방 - 익산 금마면·왕궁면 유네스코 백제역사유적
익산 미륵사지에 어둠이 내리자 경관 조명을 밝힌 동·서 두 개의 탑이 연못에 비치고 있다. 백제 무왕 때 건립한 미륵사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찰로 평가된다. 익산 왕궁면에 백제왕궁박물관이 있다. 전시실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수부(首府)’라 새겨진 작은 기와 파편과 마주한다. 왕실과 중앙 관청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익산에 백제 왕궁과 중앙행정기구가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유물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한성에서 시작한 백제가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 역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이야기는 생소하다.
■탑만 남은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백제왕궁박물관은 ‘수부’ 기와를 시작으로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3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금과 유리제품, 토기, 연화문 수막새와 함께 이를 생산하던 도가니 등의 유물이 ‘백제 도읍 익산’의 퍼즐을 하나씩 꿰어 맞추듯 이어진다.
박물관 앞 왕궁리유적은 공주 부여의 유적과 함께 ‘백제역사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에는 이곳이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 터’라 적혀 있다. 1976년부터 30년 넘는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조각난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중이다.
왕궁은 백제 무왕 때인 639년에 건립한 것으로 밝혀졌다. 두께 3m의 담장이 동서 245m, 남북 490m가량 둘러싼 장방형이다. 왕궁 내부는 남북 공간을 1:1로 분할해 남쪽에 생활 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두는 구조였다. 중국과 일본의 고대 왕궁에서도 확인되는 궁성 배치로, 이들 국가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궁터에선 왕이 정사나 의례를 행한 것으로 보이는 정전을 비롯해 14개의 건물 터가 발견됐다. 백제 최고의 정원과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 수준급의 화장실 유적이 확인됐다.
관궁사·대궁사 등의 절터도 남아 있다. 평지나 다름없는 낮은 구릉에 현재는 오층석탑만 우뚝하다. 앙상한 가지를 늘어뜨린 벚나무 군락과, 몇 그루 남겨 둔 소나무도 겨울 찬 바람에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데, 단아한 석탑 하나로 텅 빈 유적이 꽉 찬 느낌이다. 박물관에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금마면 미륵사지는 왕궁리유적과 함께 익산의 대표적 백제 유적이다. 미륵사는 백제 최대 사찰로 무왕(600~641년 재위)에 의해 창건돼 17세기경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커다란 종을 엎어놓은 것 같은 절터를 바깥으로 한 바퀴 돌면 1.5㎞에 이른다. 당대 최대 사찰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사찰은 발굴 조사를 통해 3탑 3금당이라는 독특한 형식이었음이 밝혀졌다. 동·중·서 3개의 예불 공간은 각기 독립돼 있으면서도 북쪽의 큰 강당으로 통합되는 구조였다.
현재 가운데 목탑은 사라지고 동서 양쪽에 두 기의 석탑이 서 있다. 그런데 겉모양이 마치 다른 시대 다른 절의 석탑처럼 이질적이다. 기초만 남아 있던 동탑을 1990년대에 명확한 고증 없이 서둘러 복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전한 형태의 9층 동탑보다는 6층까지만 남아 있는 서탑에 더 눈길이 쏠린다.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석탑이다. 돌도 나이를 먹는다. 상부가 허물어졌지만 세월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다해가는 국운을 되살리고자 한 무왕의 간절한 바람과 석공의 공력이 묻어난다. 해가 떨어지면 두 기의 석탑과 당간지주에 경관 조명이 켜진다. 앞쪽 연못에 그 모습이 비치면 1,400년 전 백제의 역사가 은은하게 되살아난다.
미륵사지 발굴은 1980년부터 15년간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2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막새기와, 문자를 새긴 명문와, 토기와 자기류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수는 많지 않지만 금속과 목제품, 벽화 조각, 유리 및 옥제품도 수습됐다. 바로 옆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에 창건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서동, 즉 무왕이 공주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의 법사를 찾아가던 중 갑자기 산 아래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왕이 그 연못을 메워 3개의 탑과 금당을 세웠으니 바로 미륵사다. 용화산은 현재 미륵산(430m)으로 불린다. 정상 바로 아래 사자암은 당시 사자사로 추정되는 절이다. 주차장에서 거리는 300m에 불과하지만,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길이라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사자암 아래 구룡마을엔 대규모 대나무 숲이 있다.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해 제법 유명하진 관광지다. 대숲 산책로로 들어서면 빼곡하게 늘어선 대나무가 주변 풍광과 하늘을 가린다. 온갖 소음은 사라지고 바람에 댓잎이 서걱거리는 소리만 가득하다.
미륵산 정상 부근은 미륵산성이 두르고 있다. 고조선시대 기준왕이 쌓았다고 ‘기준성’이라고도 부르지만 고증하기 힘들고, 마한 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과 견훤을 쫓을 때 마성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마성이 바로 이 산성이다.
미륵산 등산로는 여러 개지만 산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동남쪽 신용리에서 연결된다. 주차장(금마면 신용리 181-31)에서 약 1㎞ 완만한 산길을 오르면 동문 터다. 옛 성돌이 남아 있는 골짜기에서 양쪽 가파른 산자락으로 성벽을 복원해 놓았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계단이 하늘로 이러지는 듯하다. 무왕이 꿈꾸던 미륵 세상으로 오르는 길처럼 보인다. 사고 위험이 있어 경사 구간 성벽 위로는 걸을 수 없게 통로를 막아 놓았다.
■그윽하게 이어지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금마면을 중심으로 한 익산에는 무왕의 어릴 적 별명인 서동과 관련한 유적과 상호가 유난히 많다. 금마는 백제시대부터 불러온 ‘금마저(金馬渚)’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익산의 옛 중심이었다. 쌍릉과 토성도 ‘익산 왕도(王都)’ 설을 뒷받침하는 퍼즐의 한 조각이다.
금마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낮은 구릉에 자리 잡은 2개의 봉분을 ‘익산쌍릉’이라 부른다. 북쪽에 위치한 것은 ‘대왕묘’, 남쪽의 것은 ‘소왕묘’다. 부여 능산리 고분의 돌방무덤과 내부 구조가 같아 백제 말기인 7세기 전반의 것으로 조사됐다. 미륵사의 창건 연대를 감안하면 무왕과 왕비의 능묘일 가능성이 있지만 단정하지는 못한다. 직선으로 약 200m 떨어진 두 무덤은 아담한 솔숲 산책로로 이어져 있다.
인근 오금산 정상부에는 흙과 돌로 쌓은 익산토성이 있다. 발견된 유물로 볼 때 백제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오랫동안 사용됐던 것으로 여겨진다. 1980년대에 2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나온 유물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것도 섞여 있지만 백제 말의 기와와 토기가 주종을 이룬다. 토성은 나지막한 산자락을 한 바퀴 두르고 있다. 높이 125m에 불과하지만 주변이 온통 평지여서 부드러운 성곽을 따라 걸으면 평온했던 시절 백제의 향기가 감도는 듯하다.
금마면 소재지 북측 금마저수지에는 ‘서동공원’이 조성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농업용수 공급 용도로 축조된 저수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와 닮아 있어 ‘지도 연못’이라고도 불린다. 미륵산을 수원으로 하고 있어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주변에 오염원이 없어 1급수의 수질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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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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