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초 미국 경제는 한국전쟁까지 잇따른 전쟁 참전으로 정부 부채가 급격히 치솟았다. 금융기관들은 더 이상 국채를 사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1953년 신규 30년물 채권에 3.25%포인트의 추가 금리를 얹어 발행하자 국채가 완판됐다. 하지만 정부의 안심도 잠시, 투자자들이 이를 곧장 시장에 내다 팔면서 채권시장은 더욱 교란됐다. 알고 보니 국채 투기였던 것이다.
현상만 놓고 보면 당시 미국 경제는 채권시장의 불안으로 흔들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 경제를 악화시킨 주범은 채권일까, 투기꾼일까. 아니면 시장 안정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미국 정부일까. 상식적인 판단을 하자면 적어도 채권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십 년 전 이야기를 뜬금없이 꺼낸 것은 최근 미국 암호화폐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마치 채권 투기꾼이나 미비한 제도보다도 오히려 채권이 비판 받는 상황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세계 3위 암호화폐 거래소 FTX가 파산에 이르자 미국 현지에서는 암호화폐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커졌다.
비트코인이 탄생한 지 13년 동안 따라붙던 꼬리표는 가치의 근본이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는 ‘암호화폐는 사기’라는 평가에 한몫을 해왔다. 일부 공감이 되지만 어찌 보면 가치의 생성 과정 자체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애초 가치란 사람들이 합의하면 생겨나고 수요와 공급이 가치의 크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사례가 금이다. 금의 산업용 수요는 3%에 불과하고 97%는 가치 저장, 또는 투자용이다. 금이 귀한 이유는 ‘금은 귀한 것’이라는 인류의 오랜 믿음에 근거한다. 미술품도 그렇고, 1980년대까지 취미 활동으로 인기를 끌었던 ‘수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술품이나 수석이 귀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시장은 커지고 가치는 상승한다. 암호화폐를 두고 그 자체가 사기라고 비판하기도, 혁신이라고 추켜세우기도 어색한 면이 있다. 투자자들이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시장은 자연스레 쇠퇴할 것이고, 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면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올 4월 디지털 자산과 관련한 한 연설에서 ‘기술 중립성’을 강조했다.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에 선하다, 또는 위해하다는 낙인을 찍지 말자는 취지에서 가능성과 위험을 중립적 시각에서 고민하고 제도를 마련해야한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이 연설은 바이든 행정부가 디지털 자산과 관련해 각 기관에 제도를 마련하라고 내린 행정명령의 사후 조치 중 하나로 미 재무부가 규제 수립의 원칙으로 제시한 키워드가 바로 기술 중립성이다.
현재 암호화폐 시장에서는 1950년대 채권 투기꾼보다 악질적인 행태가 넘쳐나는 것이 현실이다. FTX 사태만 하더라도 경영진은 고객이 투자하기 위해 예치한 자금 160억 달러 중 100억 달러를 관계사에 대출해줬다. 결국 연쇄 부실이 현실화돼 최대 66조 원에 달하는 회생절차가 진행되게 생겼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고객 자산의 운용을 금지하는 정부의 규제 자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주식시장은 다르다. 고객 자산은 회사가 운용할 수 있는 돈과 구분해야하고 애초 수수료 외에 직접 고객 돈을 운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FTX는 고객 자금으로 서로 빌려주고 투자하면서 수익을 내왔다. FTX의 급성장도 이런 제도적 미비를 이용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암호화폐를 둘러싼 사기와 투기, 도덕적 해이, 이에 따른 투자자 손실을 막기 위해 규제 마련은 미룰 수 없는 일이 됐다. 모두가 암호화폐를 외면하면 시장이 사라질 수도 있지만 이미 암호화폐 가치에 합의한 이들이 적지 않다. 혹시나 암호화폐가 다시 가격 상승기를 맞아 현재 8,000억 달러인 시가총액이 더욱 늘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까지 규제가 없다면 FTX 사태는 재발한다.
1950년대 채권시장의 붕괴를 막은 방법은 리포 시장의 활성화였다. 제도가 다듬어지자 시장은 안정됐다. 이번 FTX 사태가 암호화폐와 투자자에 대한 비난으로 끝나기보다 기술 중립성에 기반한 글로벌 제도 구축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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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록 서울경제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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