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다. 그러나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과연 음악의 ‘비창’만큼 삶과 예술의 의미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또 있을까. 세상에는 ‘비창’이란 이름을 가진 클래식 음악이 두 개 존재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이 그것이다. 비창(悲愴)… 즉 슬프다, 비감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인데 정말 ‘비창’이 그 음악에 걸맞는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름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악보) 출판사들 때문에 ‘8번’, ‘6번’보다는 부르기 좋고 외우기 쉬운 이름들이 탄생(?)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비창’을 들으면서 일부러 비감해질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름이 가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면이다. 청소년 시절, 음악을 들으면서 이것이 왜 ‘비창’인가하고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 특히 베토벤의 ‘비창’은 특별히 비감하다는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뚜벅뚜벅 자기 인생을 걸어가려는 내면의 의지와 용기… 삶의 외로움 등이 느껴지는 것이 (소나타) 8번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고나 할까.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은 친해지기 가장 어려운 음악 중 하나였다. 삶에서 겨울 공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이 마치 이런 음악과 같았다. 싸늘한 시체와 같은 음악이었다고나 할까.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비관적이고 어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이 바로 ‘비창’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만큼 음악이 낳은 가장 어둡고 비관적인 음악은 없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면 영혼을 좀먹을 수 있는 음악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다만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음악이고 또 ‘비창’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고 해서 누구나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명곡이 되어야한다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는 생각이다. 다만 차이코프스키의 죽음과 연관되어 이 음악이 상당 부분 극적인 요소가 다분한 작품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비창’은 유명세를 치루고 있는 작품 치고는 다소 과대평가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비창’은 오히려 음악 자체보다는 삶과 예술이 주는 의미때문에 더 세인에게 알려지게 됐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겨울 공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삶이 그 마지막에 섰을 때, 그 의미는 조금 다르다. 강렬한 추위. 전신을 오싹케 하는 삭막한 겨울바람. 그리고 죽음. 실존 앞에 선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겨울 연가는 과연 어떤 음악으로 우리에게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종교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침묵의 기도로서 삶과 이별을 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한 편의 초연한 시로서 죽음의 순간까지도 감동을 전해야하는 숙명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차이코프스키처럼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찾아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베토벤의 경우처럼 삶의 정점에서 오히려 마지막을 고해야하는 그런 개떡(?)같은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조차 죽음의 끝을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을 어쩌면 우리는 예술가들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고독… 그리고 삶보다는 죽음의 특징인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는 예술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삶이라는 찰라의 순간에 찰라의 예술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속에서 오로지 삶의 충만한 희망과 에너지만 느껴져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삶보다는 죽음의 특징인 절망... 또 그 고독의 한가운데를 뚜벅뚜벅 걸어가려는 어떤 의지가 느껴져 오기 때문에 우리는 슬픈 연가로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베토벤의 ‘비창’ 2악장만큼 오싹하게 우리를 삶의 중앙에서 죽음으로 인도하는 그런 외로움을 체험하게 하는 순간도 없을 것이다. 베토벤의 전 생애가 그렇듯 2악장의 예지는 분명 ‘비창’이라고 부를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죽음도 ‘비창’을 남기면서 우리에게는 하나의 별이 되었다. 그것은 분명 오싹한 시체이자 죽음뿐인 음악이지만 또 우리는 음악이 있기 때문이 죽음조차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차이코프스키를 통해 배울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그 삶의 하일라이트를 장식해 준 것이 베토벤의 2악장들이었다면, 가을 들판에 울려퍼지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악 소리야말로 차가운 겨울 바람이 있기에 우리가 더욱 봄을 기다리듯, 삶의 진한 색채를 더해 주었던 음악도 없었다. 가을은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 모든 존재의 초월적인 생명력에 감사를 느끼게 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겨울은 봄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 끝이 아니듯 우리들의 모습도 이같이, 가을에 듣는 ‘비창’의 아름다운 선율에 우리를 비추며 겨울 들판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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