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칸토(Bel Canto)는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이다. 19세기 초 오페라의 황금시대에 유행했던 성악기법으로, 사람이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나 싶게 화려한 기교를 부리며 노래하는 ‘목소리의 초절기교’라 할 수 있다. 주로 여주인공을 맡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고음역대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며 트릴과 꾸밈음이 작렬하는 아리아를 선보이는데, 이는 극기적인 성대훈련을 통해 음높이, 성량, 셈여림을 완벽하게 컨트롤해야 노래할 수 있는 어려운 가창법이다.
벨칸토 오페라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에는 여가수가 기교를 더 많이 더 화려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스토리를 한층 극적으로 만들었으며, 종국에는 주인공이 미쳐버리게 함으로써 이른바 ‘광란의 아리아’라고 하는 ‘매드 씬’을 집어넣는 것이 유행이었다. 미친 여자는 미친 듯이 노래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들어 음악성과 작품성보다 극단적인 성악기교의 전시장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높아지면서 벨칸토 오페라는 점차 무대에서 사라졌고, 이윽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혀갔다. 그런데 약 100여년 세월이 지난 1950년대에 이 어렵고 인기없는 벨칸토의 매력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불세출의 가수 마리아 칼라스다.
칼라스는 당시 거의 공연되지 않던 벨칸토 오페라들, 그 중에서도 벨리니의 ‘노르마’와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이하 루치아)를 드라마틱하고 카리스마 넘치게 공연함으로써 아름답고 처절한 걸작 오페라로 재탄생시켰다. 그때 이후 ‘루치아’와 ‘노르마’는 오페라 극장들의 인기 레퍼토리가 되었고, 수많은 소프라노들은 칼라스의 ‘루치아’가 표준인 벨칸토 가수가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바로 그 벨칸토 오페라의 대표작 ‘루치아 디 람메르무어’(Lucia di Lammermoor)가 지금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공연되고 있다. LA 오페라의 2022-23 시즌 개막작으로, 지난 17일부터 10월9일까지 6회 공연된다.
1835년 초연된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대표작 ‘루치아’는 스코틀랜드의 래머무어 지역에서 일어난 실제사건을 토대로 월터 스콧 경이 쓴 소설(‘래머무어의 신부’)이 원작이다. 스코틀랜드 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불리는 이 소설은 원수 가문의 남녀 루치아와 에드가르도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다가 결국에는 모두 죽음을 맞는다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LA 오페라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합작인 이 새로운 ‘루치아’ 프로덕션은 이제껏 보아온 공연들과 많이 다르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배경을 21세기 미국 중서부의 러스트 벨트로 옮겨놓은 탓이다. 사실 요즘 오페라 공연은 고전을 현대판으로 재해석하는 트렌드가 대세여서 전통적인 무대는 오히려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지만, 젊은 호주 감독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이번 ‘루치아’는 그중에서도 더 파격적이다.
무대는 전당포, 모텔, 미니마트, 리커스토어, 약국이 오밀조밀 자리잡은 쇠락한 공업도시의 한 마을이다. 고물자동차와 찌그러진 픽업트럭들이 황폐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한물간 드라이브인 극장이 운영되는 이 동네에서 청바지를 입은 루치아와 입영을 앞둔 에드가르도는 열정적인 풋사랑을 나눈다. 귀족이던 주인공들은 뒷골목의 경박한 청춘남녀로, 두 연인의 편지는 스마트폰 메신저로, 칼부림은 총성으로 대체되었고, 어쩌면 루치아는 은밀하게 약물을 사마시는 약물중독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21세기 미국에서, 파산을 앞둔 오빠의 회생을 위해 여동생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을 강요당한다는 설정이 자연스러운가?
이 부자연스런 설정의 공연을 보면서도 계속 박수갈채를 보낸 이유는 음악적으로 최고 수준의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치아(아만다 우드베리), 에드가르도(아르투로 샤콘-크루즈), 오빠 엔리코(알렉산더 버치 엘리엇), 라이몬도 목사(에릭 오웬스), 새신랑 아르투로(앤소니 시아라미타로) 등 전 출연진 모두가 이처럼 고르게 강렬한 무대를 보여준 공연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특히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매드 씬’, 거의 20분간 계속되는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가 압권이었다. 글래스 하모니카의 신비한 음색을 배경으로 울고 떨고 애원하고 무너지다가 마침내 미쳐버리는 열연은 기대이상이었다. 아만다 우드베리는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결혼 첫날밤 신랑을 칼로 찌르고 미쳐버린 여자의 절규를 현란하면서도 절제된 기교, 풍부한 성량과 음색,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력으로 매드 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또 하나 갈채를 보내고픈 대상은 LA 오페라와 코러스, 그리고 LA 오페라의 새 레지던트 컨덕터로 처음 포디엄에 오른 지휘자 리나 곤잘레스-그라나도스다. 도니제티의 아름다운 음악을 반짝반짝 안정적으로 연주한 이들 덕분에 공연이 한층 풍요로웠다.
한편 이 오페라에는 특별히 한인들이 즐거워하거나 의아해할 합창곡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원곡이다. 물론 찬송가가 오리지널이 아니라, 이 오페라 2막3장의 결혼식에서 하객들이 부르는 축하곡(‘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의 멜로디를 독립운동가 남궁억(1863~1939) 선생이 빌려다 우리 노랫말을 붙여 찬송가로 만든 것이다.
루치아 역의 아만다 우드베리는 21일(오늘)과 27일까지 공연하고, 28일과 10월2일, 9일에는 리브 레드패스가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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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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