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YouTube) 등이 발달하면서 같은 음악이라도 좋은 연주를 가려 들을 수 있는 인터넷 음악 감상 시대가 도래했다.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연주인의 능력에 대해 예민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유튜브에 나온 연주들을 들으면서 같은 음악이라도 울림이 다른 연주를 선호하는 취미를 가질 수 있게 됐다. 기왕이면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연주인을 통해 들으면 더욱 금상첨화가 아닐까? 여러 기악곡이 저장되어 있는 유튜브 바다를 서핑하다보면 피아노 연주가 가장 다양하고 연주자들의 성향도 각양각색, 방대한 연주가 수록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활약하고 있는 최고 연주가들의 연주도 다수 들을 수 있지만 이미 사망한 전세대의 위대한 연주들도 상당량 수록되어 있는 것이 유튜브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랄 수 있다. 특히 피아노 연주는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작품의 성향에 따라 연주인들이 들려주는 특색도 각기 다르다. 베토벤이 다르고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가 다르다. 피아니스트마다 들려주는 소리가 다르니 같은 쇼팽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때도 있고 또 베토벤 연주에서는 별로인데 쇼팽 연주에서는 압도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경우도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테크닉과 정확성으로 감동을 주는 연주보다는 울림이 있는 피아노 연주가 더 마음에 드는 편이다. ‘울림’이란 언뜻 주관적인 표현인것 같지만 사실 테크닉 없는 울림이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보면 테크닉보다 울림이 진한 연주가 더 어려울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울림이 큰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 피아니스트는 우크라이나(당시 러시아) 출신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1915-1997)였다.
리흐테르는 흔히 20세기 최고의 연주자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하는데 얼마전 타계한 대가 브라드미르 호로비츠도 마음에 드는 러시아 피아니스트는 단 한 명뿐이라며 리흐테르를 꼽기도 했다. 특히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등 독일 작곡가들의 연주에 능해서 마치 베토벤이 살아 있으면 저렇게 연주하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타건의 열정적인 울림이 압도적이다. 리히테르는 아버지가 피아니스트여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랐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피아노를 독학으로 배웠다. 타건이 워낙 강렬하여 마치 음악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것이 특성인데 리히테르 역시 최근 반 클라이번 콩쿨에서 우승한 임윤찬처럼 유학을 가거나 어떤 대가의 지도 없이 혼자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오른 특이한 이력이 있었다.
위대한 연주가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사실 누구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만약 그 길을 알 수만 있다면 ‘그 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에서 한번쯤 파헤쳐 볼 일이다. 요즘 한국의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비롯 양인모(바이올린), 최하영(첼로)등이 반 클라이번 콩쿨, 시벨리우스, 엘리자베스 콩쿨 등에서 우승하여 한국 음악계가 떠들썩한 모양이다. 특히 5,6년 전 조성진이 쇼팽 콩쿨에서 우승한 이후 선우예권, 임윤찬 등이 반 클라이번 콩쿨에서 연속 우승하면서 한국인 음악도들의 실력이 세계에 과시되는 고무적인 현상을 빚었다. 지난 60여년간 한국 음악도들이 세계 대회에 나가 우승한 경력은 무려 160회가 넘는다고 한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김영욱 등은 ‘음악 콩쿨’은 ‘필요악’일 뿐이라며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한 바 있지만 한국의 좁은 클래식 시장을 감안할 때 음악도들이 자신을 알릴 기회로서 콩쿨을 찾는 것 역시 말릴 수 없는 형편이다. 콩쿨이란 일순간의 화려한 불꽃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가가 되는 길은 더욱 지난한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한 노력이다. 콩쿨의 중요성과 더불어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들으면서 ‘아름다운 연주’에 대해 생각해 봤다. 20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꼽히는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는 친구 에밀 길레스(1916-1986)의 연주를 듣고 자신은 평생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에 관해서 만큼은 연주회든 녹음이든 일절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리흐테르에게 있어 에밀 길레스의 연주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연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밀 길레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바로 스뱌토클라프 리흐테르였다. 왜냐하면 자신을 알아준 자가 바로 리흐테르였기 때문이다. 에밀 길레스와 임윤찬의 연주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사실 너무 가혹한 비교가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은 세기에 몇 명 나올까 말까하는 대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초년생이기 때문이다. 길레스의 연주는 알이 꽉 찬 곡식에서 풍기는 향기가 있다고나 할까? 연주란 연주를 잘 하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기 때문에 연주를 잘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쿨에서 우승한 것은 그만의 음악으로 심사위원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부에서는 테크닉이 완벽했기 때문이라고 추켜세우고 있지만 테크닉 만으로는 결코 우승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다. 임윤찬은 임윤찬만의 카리스마로 심사위원들을 감동시키고 세계적인 반 클라이번 콩쿨에서의 우승이라는 쾌거를 올렸다. 이제는 각종 연주무대를 통해 자신을 감동시키고 청중들을 감동시켜야 할 차례다. 어쩌면 훨씬 더 멀고도 험난한 길일지도 모른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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