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도 임윤찬의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에 대한 경이가 계속 회자되고 있다. 특히 결선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해서는 클래식 연주자들과 비평가들조차 경탄하는 해설이 잇달고 있다. 임윤찬의 연주가 왜 그토록 특별했는지 한 소절 한 소절 분석하는 유튜브 영상들을 보노라면 과연 그날의 공연은 ‘세기의 연주’라 불려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결선 공연을 불과 하루 앞두고 임윤찬이 피아노를 바꿨다는 뉴스가 잠깐 나왔었다. 원래 연주하기로 했던 독일산 스타인웨이 대신에 미국산 스타인웨이로 긴급 교체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만류했지만 대회 심사위원장이자 지휘를 맡은 마린 알솝은 “현명한 선택”이라며 그를 격려했다고도 했다. 결국 임윤찬은 교체한 피아노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질주하듯 연주해 우승을 꿰찼던 것이다.
스타인웨이(Steinway)는 전 세계 연주장의 98%가 사용하고 있는 ‘피아노의 황제’로 100% 수작업으로 제작된다. 바로 그 때문에 악기마다 성격과 소리가 미묘하게 다를 수 있는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뉴욕에서 만드는 미국산 스타인웨이는 좀더 소리가 크고 근본적인 음색을 가진 한편, 함부르크에서 만드는 독일산 스타인웨이는 깨끗하고 투명하며 좀더 직접적인(direct) 소리를 낸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임윤찬은 갑자기 피아노를 교체하는 이유에 대해 독일산 스타인웨이의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어딘지 불편하게 들렸다”고 설명했다. 그의 귀가 얼마나 예민한지를 보여준 에피소드라 하겠다.
클래식 연주자에게 악기는 생명과도 같다. 악기를 통해서만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피아니스트들은 큰 핸디캡을 안고 있다. 거의 모든 악기 연주자들은 자기 악기를 직접 가지고 다니며 연주하지만 피아니스트는 악기를 갖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음악회가 열리건 피아니스트는 현지 연주회장에 마련된 피아노에 스스로를 맞춰야한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그의 책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에서 “마음에 드는 피아노를 만나는 일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도 훨씬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는 피아노를 만났을 때의 심정이란 겪어보지 않고는 결코 모른다.”고 썼다.
게다가 현과 관악기 주자들은 자기 악기를 직접 관리하고 음정을 직접 조율할 수 있는 데 반해 피아니스트는 전문 테크니션 없이는 스스로 조율하지 못한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줄이 끊어져도 자신이 교체하고, 오보와 클라리넷 주자들은 리드(reed, 입에 대는 얇은 진동판)를 직접 깎아 만들기도 하며, 팀파니 주자들은 두드리는 말렛(mallet)을 자기가 만들어 쓰기도 하지만 피아니스트들은 88개의 건반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피아노는 각 건반에 연결된 해머가 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타현악기인 만큼 메커니즘이 꽤 복잡하기 때문이다.
큰 연주장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여러대 있고, 전속 조율사도 늘 대기하고 있지만 까다로운 피아니스트는 마음에 드는 피아노가 없거나 자신에게 맞는 조율사를 만나지 못할 경우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피아노의 소리, 볼륨, 터치감, 페달의 무게, 심지어 건반의 느낌이 폭신한지 팽팽한지 뻑뻑한 지까지도 문제 삼는 것이다.
때문에 유명 피아니스트 중에는 엄청난 운송비를 감당하면서까지 자신의 피아노를 직접 싣고 다니는 완벽주의자들이 가끔 있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그가 좋아하는 뉴욕산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여러 대 수집한 후 전 세계로 가지고 다니면서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크리스티안 짐머맨도 거의 항상 자신의 피아노를 끌고 다니며 연주하고 있고, 미츠코 우치다 역시 피아노의 상태에 유별나게 민감해서 자신의 피아노를 고집하기로 유명하다. 런던 자택에 3대의 그랜드피아노가 있고, 독일에도 한 대를 소장하고 있는 우치다는 유럽 연주 때는 물론이고, 피아노 상태가 미덥지 않은 남미 연주여행 때면 반드시 자신의 악기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 한편 피아노의 상태에 그다지 목매지 않는 ‘대인배’ 피아니스트도 적지 않다. 다닐 트리포노프가 대표적으로, 피아노의 음질이 웬만큼 괜찮다고 판단되면 건반의 터치 같은 이슈는 거의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한다. 제러미 뎅크 역시 수년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가능하면 피아노의 테크니컬 이슈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며 “연주장에 도착하면 우선 마음을 가라앉힌 후 피아노에게 말을 걸고 친해지면서 적응한다”고 자신만의 대처방법을 전했다.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콘래드 타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집에서 연습한 것처럼 완벽하게 콘서트에서 연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악기를 만날 때마다 조금 겸손해야 하고, 자신의 연주 안에서 고유의 커넥션을 개발해야 한다.”
완벽한 연주를 하기 위한 뮤지션들의 고군분투는 끝이 없다. 한 곡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를 기억하고 감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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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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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으로 나서지 않은 우리 아이들도 악기공부가 오래 될 수록 음질에 점점 더 예민해져서 음정이 빗 나갔거나 엉망인 소리에는 못 견뎌하고 귀를 틀어막고…난리치던 일들이 생각나네요. 마치 귀에 거슬리는 삐~ 소리가 계속 들리면, 미칠 것 같은, 뭐 그런 경우와 흡사한 것 같아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연주자들의 고충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