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나 칠면조를 통으로 먹다 보면 가슴 쪽에서 한글의 ㅅ자 모양 또는 영어의 Y자 모양의 뼈가 나온다. 조류의 가슴뼈 앞에 있는 ㅅ자 또는 Y자 모양의 이 뼈가 바로 위시본(wishbone)이다. 한자로는 창사골(暢思骨) 또는 차골(叉骨)이라고 하는가 보다.
이 뼈를 왜 위시본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뼈니까 뼈를 뜻하는 영어인 본(bone)이 들어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뼈에 뭔가를 바라거나 소망한다는 의미를 가진 위시(wish)라는 단어는 왜 붙인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뼈를 이용해서 소원(wish)이 이루어지는지 알아보기 때문이다.
방법은 이렇다. 마주한 두 사람이 이 뼈의 갈라져 나간 양쪽 끝을 각각 잡는다. 그런 후 힘을 주어 잡아당긴다. 그러면 뼈가 나뉘어지는데 이때 위에 자리한 가지가 나뉜 어느 한쪽 뼈에 붙어간다. 이렇게 이 뼈를 나누었을 때 긴 쪽의 뼈를 가진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지금은 뭐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전에는 있었다. 나뭇가지에 붙은 잎은 하나 씩 떼어내면서 ‘나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반복하다가 마지막 남은 하나의 잎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보는 그런 것 말이다. 나뭇잎으로는 아카시아(지금은 아카시 또는 아까시라고 한다)가 주로 쓰였지만 잎이 많기만 하면 그게 뭐든 그 잎을 하나 씩 떼어내면서 할 수 있다.
계절적으로 또 지리적으로 잎이 많은 그런 것을 구할 수 없어도 그와 유사한 시도는 가능하다. 육교 계단을 오르면서 ‘이 계단의 수가 홀수면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거야.’하고 생각해보는 것처럼 말이다. 계단은 육교가 아니어도 괜찮다. 지하철 계단일 수도 있고 건물 입구로 이어진 계단일 수도 있다.
나뭇잎이나 계단을 이용한 이런 행동은 무엇인가를 추측하거나 어떤 결정을 할 때 자신의 의사 또는 의지가 개입되는 것을 피하려 할 때 사용된다. 이렇게 자신의 의사 또는 의지가 개입되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그 추측이나 결정의 결과에 대해 자신 혼자서 오롯이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여기 두 회사원이 있다. 그 회사원 중에 한 사람은 이번 일요일에 출근해야 하는 일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일요일에 출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출근해야 한다. 자, 어쩐다? 가위 바위 보를 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가위 바위 보를 하게 되면 진 사람은 언짢다. 가위 바위 보는 심리전과 전략이 동원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졌다 또는 패배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동전 던지기는 조금 나으려나? 동전 던지기는 심리전과 전략이 동원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가위 바위 보보다는 ‘상대방에게’ 졌다 또는 패배했다는 생각은 덜 들겠다.
동전 던지기처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 사용했던 것이 위시본이다. 위시본을 이용하면 ‘상대방에게 졌다’는 생각은 덜 든다. 그저 ‘상대방의 운이 더 좋았던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위시본은 일종의 가벼운 내기 같은 것으로 결코 심각한 미래 예측이 아니다. 비록 짧은 쪽을 잡게 되더라도 긴 쪽을 잡은 사람에게 ‘축하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구나. 너는 좋겠다.’라는 상대방에 대한 축복의 말을 하는 정도이다. 결코 ‘하… 내 소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구나…’라는 심각한 좌절감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결과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우지 않음으로써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 좌절감을 주지 않게 한다는 것이 위시본을 이용한 소원 달성 알아보기의 초점이다. 조금 심각하게 생각한다고 한들 ‘위시본의 짧은 쪽을 잡은 것은 그저 운이 없었던 것일 뿐이지 그게 뭐 나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추억 소환 하나. 1960년대 경상북도의 어느 작은 도시 읍내에는 우마차가 다녔다. 그때는 그게 뭐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소가 끄는 우마차가 다니는 길에는 쇠똥이 있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아차차 쇠똥을 밟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국민학생들의 대화는 이랬다.
“아, 씨… 똥 밟았데이…” “근데 니 알고 밟았나 모리고 밟았나?” “모리고 밟았다….” “아, 글나? 그라마 니 오늘 운 억수로 좋데이.”
아니 세상에, 아무리 촌놈이라도 그렇지, 알면서 일부러 쇠똥을 밟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모르고 쇠똥을 밟았다’는 것이 ‘운이 좋은 날’이라는 징조가 된다는 것도 또 어디서 나온 말인가. 하지만 그 어린 꼬마들도 ‘이미 벌어진 안 좋은 일’을 ‘행운’으로 치환하는 지혜가 있었다. 그 옛날 촌놈들도 그랬는데 이제 와서 짧은 쪽 위시본을 잡았다고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위시본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닭을 먹지 않더라도 생활 속에서 위시본을 만날 수 있다. 샐러드드레싱 중에 위시본(Wish-Bone)이라는 상표가 있다. 그 영문 상표명 위에 ‘ㅅ’자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지금껏 말해온 위시본인 것이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이 상표의 드레싱을 하나쯤 만날지도 모른다.
위시본은 행운의 상징으로 사용되어서 그림에 들어가기도 하고 위시본 모양의 장신구를 지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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