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가 리처드 닉슨을 따라했다면 미국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카터 대통령이 1980년 대선에서 속절없이 정권을 내준 데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폴 볼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내버려 둔 것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눈 행위였다. 한 해 전 임명한 볼커는 물가를 잡겠다며 금리를 무자비하게 올렸다. 시중금리가 20%까지 치솟자 모든 원성은 카터를 향했다. 감세를 외친 로널드 레이건 후보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카터는 패배가 뻔한데도 볼커의 ‘독립’을 뺏지 않았다. 카터의 머릿속에는 11년 전 경제 보좌관이자 측근이던 아서 번스를 연준 의장에 앉힌 닉슨 대통령이 아른거렸을 것이다. 닉슨은 유동성이 넘치는데도 번스에게 돈줄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도록 요구했고 결국 재선에 성공했다. 카터가 닉슨처럼 노골적으로 통화정책에 개입했다면 임기 연장에 성공했고 미국 경제도 다른 길로 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리더는 정치 생명이 단절되는 순간에도 원칙을 지켰고 미국은 초강대국의 길을 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시험을 치렀다. ‘정치 초보’지만 압도적인 승리로 여소야대의 정치판을 흔들고 싶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선거법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수단을 썼다. 대변인을 전장에 보내고 선거가 임박해 여성 장차관을 줄줄이 임명하는가 하면 투표 직전 39조 원을 쐈다. 우여곡절 끝에 선거가 끝났지만 ‘여의도’는 여전히 우호적이지 않다. 압도적인 의석의 야당은 국가적 개혁 과제는커녕 규제·세제 어느 것 하나 ‘윤석열의 공적’으로 남게 할 리 없다. 선거전 내내 포퓰리즘도 모자라 김포공항 이전으로 클리엔텔리즘(후견주의)의 기술을 보여준 야당 아닌가.
사실 집권 초의 환경만 놓고 보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나쁘지 않았다. 감세와 통화 스와프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겨냈고 4대(공공·금융·노동·교육) 개혁을 주창해 박수를 받았다. 광우병 시위, 세월호 참사가 아니었으면 우리 현대사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비호감 선거로 탄생한 윤 대통령의 집권 초 분위기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정치 기반은 여전히 약하고 광우병·세월호보다 덜한 충격에 흔들릴 수 있다. 인플레이션의 악령은 갈수록 맹위를 떨치고 있다. 국정 지지율 50%는 순식간에 20%로 추락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그는 한 편에 검찰을 ‘보위대’로 뒀고 다른 한편에는 모피아(기획재정부 관료)를 포진시켰다. 막강 군단을 옆에 두고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이런 기대는 착각이다. 검찰이야 ‘윤석열 사단’이 집권 중반까지는 옆을 지키겠지만 모피아는 다르다. 지금의 모피아는 산업화 시대에 사명감으로 국가에 충성하던 집단이 아니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고시 패스’를 감투로 임관 몇 년 만에 억대 연봉을 찾아 민간을 찾고 더 큰 권력을 위해 정치권의 문을 노크한다. 대통령이 규제 혁파에 직접 나서겠다고 외쳤지만 한눈을 팔면 다른 규제를 만드는 게 관료다. 문재인 정부 첫해 1,094건이던 신설·강화 규제 건수는 2020년 1,510건으로 늘었다. 실상이 이런데 규제 혁파보다 수백 배 힘든 연금·노동 개혁을 자리를 걸고 밀고 나갈 공무원이 얼마나 되겠는가.
윤 대통령에게는 선거보다 훨씬 거친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총선까지 2년 가까운 시간, 사회는 ‘구조 개혁의 적기’라고 외친다. 물론 개혁을 외면한다고 돌팔매를 던질 사람은 없다. 도리어 기득권의 질서를 깨려 할 때마다 시끄럽다며 등을 돌릴 것이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감행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사구시가 추앙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핵심 지지층까지 떠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그만큼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고 하소연할 자유도 없다. 윤 대통령이 한숨을 쉬는 순간 관료들은 기다렸다는 듯 납작 엎드릴 것이다. 길은 하나뿐이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윤 대통령이 이 문구만 끝까지 지켜도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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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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