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년간 ‘뉴욕곰탕’ 으로 한인들 향수 달래준 김유봉 회장
▶ “미국비자·아내·교회헌금 …미국 와서 딴 별 3개”
김유봉(사진)
▶ 출퇴근 길에 늘 설교테이프 …교회건축에 기백만달러 기부
▶ “말씀대로 순종하니 모든것이 감사하고 행복”
맨하탄 32가에 나가면 곰탕 한 그릇을 먹어야만 향수를 달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한인이민자들에게 34년간 모국을 느끼게 해준 뉴욕곰탕은 2013년 가을 사라졌지만 여전히 초창기 한인이민사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김유봉 회장에게 뉴욕곰탕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들어본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인 84년 김포공항 청사 안에 뉴욕곰탕 대형 광고가 걸려있다.
▲24시간 영업기원 열다
맨하탄 브로드웨이와 5가 사이에 있는 32번가는 코로나 팬데믹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한밤중에도 불야성을 이뤄 뉴욕 명물 거리가 된 이곳은 뉴욕곰탕이 24시간 영업의 전통을 닦았다.
1970년대 브로드웨이에 한인도매상권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80년 제1회 코리안 퍼레이드가 열리면서 한인들 위상이 주류사회에 알려지던 시기, 95년 코리아타운 사인판이 부착되고 K타운이 한류 중심지로 부각되던 시기, 그 모든 시절에 뉴욕곰탕이 있었다.
“하루에 200~300명이라고 해도 1년 7~8만 명이상이 우리 집을 다녀갔다. 34년동안 1천만 명이 우리집 곰탕을 먹고 갔다고 할 수 있다.”는 김유봉 회장은 ‘남들이 하기 힘든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한국 코엑스 안 부스에서 뉴욕곰탕 캔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1992년)
▲거울 너머 배운 요리
김유봉은 1947년 경기도 여주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친 아들이 함께 농사짓기를 바란 아버지, 초등학교 교사 출신 어머니는 ‘동네 신동’이라 알려진 아들이 멀리 가서 더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온 김유봉 청년은 여행사를 하는 사촌 형 밑에서 영사관관련 심부름을 하면서 75년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일본에서 6개월을 살다 와보니 한국은 가난하고 좁아보였다. 미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애에 별 세 개를 땄다. 별 (★) 하나는 미국 비자이다. 76년 당시 29세나이는 불가능함에도 우여곡절 끝에 비즈니스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가기 전 날, 몸이 아프던 37세 사촌형이 죽었다. 유봉이는 미국에 보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장례도 못보고 다음날 아침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두 눈이 퉁퉁 부어 시애틀에 도착했다.”
76년 2월, 그렇게 온 미국에서 그는 성공해야만 했다. 시애틀과 워싱턴DC를 거쳐 뉴욕으로 온 김유봉은 영주권을 신청하려고 식당 접시닦이를 하면서 요리를 배우고 싶었다. 요리사는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는 쓰레기로 버려진 깨진 거울 조각을 주워서 디시워셔 벽위에 붙이고 거울 너머로 ‘매운탕 낙지볶음은 저렇게 만드는구나.’ 하면서 요리를 배웠다.
성실근면한 요리사로 점수를 따자 주위에선 서로 중매를 서주려고 했다.
코리안 퍼레이드에 나온 ‘뉴욕곰탕하우스’ 꽃차.(1984년)
▲아내는 두 번째 별
김송현씨와 만난 지 한 달 좀 지나 결혼했고 예쁜 아내 덕분에 영주권도 받았다. 두 번째 별(★★) 이었다. 김유봉^김송현씨는 슬하에 아들1, 딸 둘, 손자2, 손녀 6명을 두고 있다.
김유봉 회장의 초청으로 형제, 누나를 비롯 일가친척 100명이 미국에 왔다. 뉴욕곰탕이 스폰서되어 직원 30여명이 영주권을 받았고 매주일의 식당직원 예배에서는 장로 3명도 나왔다.
1979년 4월5일, 절약한 돈 2,000, 빌린 돈 2,000, 오너 모기지 6,000, 총 1만 달러로 27가 복전식당 자리에 ‘곰탕집’을 열었다. 하루는 배달 나간 아내가 오지 않자 주방에서 문밖에 나간 그는 배가 남산만한 임산부가 멀리서 뒤뚱거리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 저 여자, 고생이 많네. 남편이 누구인가?” 하면서 보니 바로 자신의 아내였다고 한다.
위의 두 아이 모두 저소득층이 이용하는 밸뷰 하스피탈(맨하탄 2애비뉴)에서 낳았다. 곰탕 한그릇이 3.25달러, 하루 40달러, 100달러가 팔렸다. 4년간 안되는 장사에 진이 빠져 있던 차 32가 스패니시 식당 자리로 옮겼다. 수리를 한 후, 82년 10월 뉴욕곰탕 하우스로 개칭하여 오픈했다. ‘나중 된 자 크게 이루리라’는 성경 말씀대로 축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침, 점심, 저녁, 밤 장사를 하는데 말 그래도 뉴욕의 돈을 다 쓸어 모았다. 헌금을 하는데 100달러짜리에 곰팡이가 낄 정도였다.
84년 한인타운이 본격형성되면서 브로드웨이~5애비뉴에 한인소유 건물도 늘기 시작할 즈음, 뉴욕곰탕 6층건물을 구입했다. 90년대 들어 미국경제 불황에 한인상권도 어려워졌다.
1층 뉴욕곰탕, 2,3층은 숯불갈비로 하면서 식탁에서 고기를 구워냈다. ‘대박’이란 말을 실감했다.
1991년 김유봉 회장은 소꼬리 수프제조 및 유통회사 JC Foods.inc를 창립하고 천연영양식품 곰탕 캔을 개발했다. 캔 제품은 로칼시장에 인기를 끌었고 한국, 일본, 러시아에도 수출 했다. 1997년 한국 IMF 여파로 브루클린 곰탕공장 문을 닫아야 했다.
2013년 6층 규모 뉴욕곰탕하우스 빌딩을 한인부동산업자에게 매각하여 11월3일 영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이렇게 한인요식업계의 산 증인이자 뉴욕시 최고령 한식당 뉴욕곰탕하우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현재 큰집식당 자리)
부부는 34년 식당 운영으로 다녀보지 못한 미 대륙횡단의 꿈을 실현하고자 미 대륙과 캐나다 일부 지역을 50여일간 다니며 더 크고 넓은 마음으로 남은 생을 살기로 하였다.
▲‘덜 먹고 덜 쓰고 덜 자야’
현재는, 김유봉 회장보다는 김유봉 장로(88년 6월8일 장로 직분)로 불려지는 그는 매일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5시30분, 집에서 7마일 거리인 교회로 가서 예배를 본다. ‘김유봉 장로의 부인 김송현 여사는 기도하는 여자’ 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늘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단다.
김유봉 회장은 뉴저지 집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면서 늘 설교 테이트를 들었다. 1,000여개의 테이프를 들었는데 82년 어느 날, 한경직 목사의 설교에 한 큰 회사 회장이 100만 달러 헌금했다는 이야기가 귀에 쏙 들어왔다.
“나도 해봐?” 하는 마음이 들었고 출석하는 뉴저지 한소망장로교회 김용주 목사에게 헌금 의사를 밝혔다. 김목사는 그에게 세례를 주었고 부부의 주례는 물론 아들의 주례를 섰고 땅을 살 때, 교회건축을 할 때 늘 함께 했다. 이렇게 교회본관과 교육관 건축에 기백만 달러를 헌금한다. 교회를 위한 헌금은 새로운 생명을 구원하는 길, 바로 세 번째 별 (★★★) 이었다.
김유봉 장로는 코로나 기간을 보람되게 보내고자 한글과 영어 성경 필사도 열심이다. 3년 예정인데 지난 2년동안 진행했다. 20년 전 뉴저지 팰리세이즈 팍 요지에 기백만 달러로 사둔 땅이 기천만달러로 황금의 땅이 되었다. 이 땅이 요긴하게 쓰이기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도 중이다.
“6층 건물로 아파트 100가구를 지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건물 완공과 동시에 이민 50년사 ‘뉴욕곰탕 이야기’를 출간하려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요즘 잠이 안 올 정도로 행복하다. 말씀대로 순종하다보니 모든 것에 감사하니 너무 행복하다.”는 그다.
단돈 160달러 들고 미국땅에 내려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김유봉 장로는 간증할 때 교인들에게 몇 번이고 복창시키는 말이 있다. “덜 먹고 덜 쓰고 덜 자야 한다.” 그리고 나누는 평범한 진리 하나, ‘기도가 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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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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