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와서 어학원을 다니던 시절 버스를 타고 다니던 날들을 기억한다. 오스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라마라는 긴 길을 다니는 버스였는데, 모팩이라는 하이웨이 너머 한국 학생들이 모여 사는 북쪽의 커뮤니티를 지나, 다운타운과 오스틴의 남쪽에 즐비한 레스토랑과 다른 비즈니스까지 다니는 버스라, 그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한국과는 달리 버스가 자주 오는 시스템이 아니었기에, 나의 아침 등교시간은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약간의 정체에도 나는 학원에 늦을 까 안절부절 하곤 했다.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하고 다시 달려야 할 무렵, 버스 기사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고가 났나 싶어 짜증이 슬그머니 나는 순간, 버스가 큰 경고음을 울리며 앞쪽 출입구 바닥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버스 앞 쪽에 앉아있던 승객들이 일어나 이미 꽉 차버린 뒤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이윽고 휠체어를 탄 승객이 버스 출입구로 이어진 브리지위로 올라 타 앞쪽 좌석 옆에 휠체어를 기댔다. 기사님은 그 뒤를 따라 휠체어를 고정 후, 곧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고, 그 분이 내릴 때도 기사님은 똑같이 일어나 휠체어를 탄 승객을 내려준 뒤, 좌석 정비 후 다시 운전대에 앉아 출발했다. 다 합해 채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저상버스의 자동 내림 장치로 한 장애인 승객이 이동할 수 있었다. 이 때 난생 처음 보았던 저상버스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왜 이제껏 한국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던 걸까? 한국에서 장애인들은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며 창밖을 내다 보았다.
이동에 대한 나의 경험은 그 다음 해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된 후 더 기억하기 싫은 부분이 되어버렸다. 대중 교통이 드문 작은 시골 마을로 가면서 나의 생활 반경이 더 좁아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드문 드문 있는 버스를 타고 집 밖을 나와 찾아가던 도서관도, 차가 없으면 이제는 갈 수 가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월마트나 다른 마트를 가야만 하는 날이면 온 하루의 일정을 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춰야 했다. 자전거를 타기엔 길의 상태가 너무 위험했고, 더운 여름이 긴 텍사스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기본적인 그로서리는 학교 바로 앞 조그만 편의점에서 되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신선한 제품보다는 저장과 보관이 용이한 인스턴트류의 제품을 파는 편의점에서 영양이 골고루 잡힌 음식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건강이 나빠지고 살이 쪘고 머리가 종종 아팠다. 한번은 두드러기가 온 몸에 나 응급실에 가야했던 적도 있었다. 거의 유일한 이동수단인 차가 없는 것이 나의 세상을 이렇게 좁게 만들어 버릴 줄을 미처 몰랐다.
이렇게 그 전까지 내가 쉽게 누리고 있었던, 그리고 언제까지나 누릴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나의 자유로운 “이동”과 “접근” 이란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는 문제인식은 부끄럽게도 성인이 되고 난 후, 한국을 떠나고 나서야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 역시도 장애인들에 대한 처우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내가 경험했던 저상버스란 것도 휠체어를 내려다 줄 수 있는 지하철 역의 엘리베이터도 모든 도시에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으로 그들의 사회적 기본권을 평등권과 함께 보장해주는 제도와 장치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는 장애가 있는 학생의 상담 및 다른 인적, 물질적, 사회 문화적인 자원들을 제공하도록 제도가 갖추어져 있고, 그와 관련해 교직원들은 정기적으로 교육을 받는 것이 의무화 되어 있다. 장애인 학생은 수업 시간마다 자신에게 필요한 자원들을 교수에게 요구할 수 있고, 교수는 더 공정한 배움의 경험을 만들기 위해 지원센터와 협력할 수 있다 (물론 얼마나 ‘잘’ 지원해 주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장애인의 이동권과 접근권은 사회가 “배려”로 챙겨주고 생색 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들의 권리이다. 하지만 그 권리를 위해 싸우는 과정을 누군가는 ‘소수 집단의 이기주의’ 라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불법시위’ 라고도 한다. 혹자는 ‘다른 곳에 쓸 예산으로 지하철 엘리베이터에 그만큼 투자했으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냐’ 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까지 제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얻어낸 장애인의 권리로 그들의 생활이 얼만큼 더 나아졌는지 묻지 않는다. 비장애인들이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헌법에 보장되어 있듯, 장애인들의 시위는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시위를 함께 하거나 직접적으로 도움은 못될지 언정, 그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는 멈추자.
<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