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하 기자의 클래식 풍경
▶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 스페셜 프로덕션
두다멜 지휘 LA필과 ‘데프 웨스트 씨어터’
디즈니홀에 장엄하고도 따뜻한 공명 울려퍼져
구스타보 두다멜 음악감독. [LA필 제공]
LA의 클래식 풍경에서 오페라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뉴욕에 140년이 넘는 역사의 세계적 오페라단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더 메트)’가 있다면, LA를 대표하는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는 더 메트에 비해 100년 이상 늦은 1986년 출범했다. 하지만 ‘LA 오페라’는 세계적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아래에서 도약해 미국에서 4번째로 큰 오페라단이 됐다. 도밍고는 2019년 ‘미투’ 스캔들로 사퇴하기 전까지 16년간 제너럴 디렉터로 LA 오페라를 이끌며 메이저 반열에 올려놨다.
남가주를 대표하는 ‘오페라 씬’는 LA 다운타운 뮤직센터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의 ‘LA 오페라’이지만, 바로 길 건너편 월트 디즈니홀에서 아주 특별한 오페라를 감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바로 구스타보 두다멜의 LA 필하모닉이 청각장애인 연기자들로 구성된 ‘데프 웨스트 씨어터(Deaf West Theatre)', 그리고 LA 매스터 코랄과 함께 새로운 프로덕션으로 제작한 베토벤의 ’피델리오(Fidelio)'를 디즈니홀에 올린 것이다.
‘악성’ 베토벤은 단 하나의 오페라 작품만을 남겼는데, 35세 때인 1805년 작곡해 초연한 후 1814년까지 10년 가까이에 걸쳐 갈고 다듬은 ‘피델리오‘가 그것이다. 베토벤은 당시 유행했던 가벼운 이탈리아풍 오페라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유와 정의, 용기 등 숭고한 정신을 상징하는 ’피델리오‘가 그의 유일한 오페라로 남았는지 모른다.
오페라 ‘피델리오’는 여주인공 레오노레가 ‘피델리오’라는 가명의 남장을 한 뒤 억울하게 지하 감옥에 갇힌 남편 플로레스탄을 구출한다는 내용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실화에 바탕을 둔 희곡 ‘레오노레 또는 부부의 사랑’이 원작이라고 한다. 베토벤은 원래 제목으로 여주인공 이름인 ‘레오노레’에 더 애착을 뒀다가, 신뢰, 신의의 뜻인 ‘피델리오(Fidelio)'로 변경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 정리된 ‘피델리오’의 줄거리는 이렇다.
18세기 스페인 세비야 근교에 거주하고 있던 귀족인 플로레스탄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교도소장인 돈 피사로에 의해 세비야 근교에 있는 교도소의 독방에 수감되고 만다. 플로레스탄의 아내인 레오노레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남자 복장을 하고 피델리오라는 가명을 썼다. 레오노레는 교도소에서 간수였던 로코의 조수로 근무하게 된다.
돈 페르난도 장관이 교도소를 감시하러 왔다는 소식을 들은 교도소장 돈 피사로는 플로레스탄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자신의 신변에 안전을 기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레오노레는 남장을 했던 자신이 플로레스탄의 아내였음을 밝힌 뒤에 총을 들면서 남편을 보호하게 된다. 교도소에 도착한 돈 페르난도 장관이 플로레스탄을 석방하기로 결정하면서 플로레스탄은 자유의 몸이 된다.
두다멜 음악감독의 지휘로 지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디즈니홀에서 3회 공연된 LA필과 데프 웨스트 씨어터 극단의 ‘피델리오’는 그 어느 면에서 보나 정말 특별한 무대였다. 30대 초반에 청력을 완전히 잃은 베토벤이 그 고뇌와 고통 속에서 작곡한 오페라를, 청각장애인들과 비청각장애인 관객들이 동시에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제작한, 처음으로 시도되는 프로덕션이었다. 이 극단의 청각장애인 배우들이 수화로 연기를 하고, 동시에 성악가들이 노래를 부르는 정말 인상적이고도 감동적인 무대가 3시간 가까이 펼쳐졌다.
일반적 오페라 같으면 각 배역을 맡은 성악가들만이 무대에서 노래를 했을 장면에, 오케스트라 무대 위로 2층으로 특별이 제작된 이번 디즈니홀 무대에는 성악가들 옆에 더블 캐스팅으로 ‘데프 웨스트 씨어터’의 배우들이 나란히 서서 동시에 수화로 연기를 펼쳤다. 이때 성악가와 배우들의 의상을 포함한 무대 프로덕션 디자인이 빛을 발했다. 성악가들은 모두 순백색 공연복으로, 그리고 함께 선 배우들은 짙은색의 연기 의상으로 통일적인 대비를 이루며, 그들의 하모니와 콜라보레이션이 극적인 승화를 이루도록 했다.
LA 매스터 코랄이 합창을 선보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대 위쪽 양 옆으로 나뉘어 선 매스터 코랄 단원들이 모두 단정한 검정색 의상으로 통일하고 노래를 하는 장면에선, 거꾸로 순백색 의상으로 통일한 데프 웨스트 씨어터 극단의 배우들 십수명이 모두 일렬로 서서 동시에 수화로 노래 가사를 전달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졌다.
이보다 아름다운 장면이 또 어디 있으랴. 이번 공연을 두고 두다멜 음악감독은 “피델리오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넘어 역경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한 베토벤의 작품일 것”이라며 “음악의 초월적인 힘에 대한 믿음으로, 청각장애인과 비청각장애인들 모두에게 똑같이 공명할 수 있는 이번 프로덕션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하나로 이루는 공명과 소통, 그 정신이 무대에서 그대로 구현된 것이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성악가들의 퍼포먼스는 최고 수준이었다. 지난번 마에스트로 주빈 메타의 모차르트 미사곡 공연에서처럼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글로벌 성악가들이 캐스트를 이뤘다. 주인공 레오노레 역의 독일 출신 소프라노 크리스티안 디보, 플로레스탄 역의 더 메트 출신 테너 이안 코지아라, 그리고 악역인 돈 피사로 교도소장 역의 중국 출신 베이스 바리톤 센양의 퍼포먼스는 더할 나위 없이 오페라에 흠뻑 빠져들게 했다. 특히 BBC 카디프 성악 월드 컴피티션 우승자 출신으로 줄리어드를 거쳐 더 메트에서 활약해온, 정말 매력적이고 파워풀한 목소리의 센양의 발견은 이날 공연의 깜짝 기쁨이었다.
그리고 LA필의 연주는 완벽 그 자체였다. 록스타와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두다멜 지휘자가 무대에 등장하자 객석에서 환호와 휘파람 갈채가 터진 가운데, 이내 시작된 ‘피델리오’ 서곡 연주는 일순에 디즈니홀 전체를 사로잡았다. 힘차게 터져나오는 첫 알레그로 4마디 첫 주제부터 두다멜의 카리스마와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LA필의 완벽한 연주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마치 베토벤 교향곡을 들을 때처럼 물결치는 듯한 감동이 몰려왔다
레오노레 역의 소프라노 크리스티안 디보(왼쪽)과 데프 웨스터 씨어터의 배우 아밀리아 헨슬리. [LA필 제공]
플로레스탄 역의 테너 이안 코지아라(왼쪽)와 배우 조시 캐스틸. [LA필 제공]
돈 피사로 역의 베이스 바리톤 센양(왼쪽)과 배우 가브리엘 실바. [LA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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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