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vis Is Back(엘비스가 돌아왔다). 1960년도. 전세계적으로 뜻깊은 한 해였고 이 해의 화두는 Elvis Is Back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2년간의 긴 세월동안 독일에서 전차병으로 근무하고 제대한 시점이라 매스컴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집중보도했다. 유명 연예인들은 대개 군 복무시에는 연예부에 소속되어 장병들의 위문 공연을 하면서 편안하게 군 복무하는 것이 보편적인 관례였는데 엘비스 프레슬리는 그 흔한 길을 택하지 않고 고된 전차 수리공을 택했다. 그 사유는 세계에서 제일 비싼 가수를 군에서 공짜로 노래시킬 수 없다는 매니저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독일에서 복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가 없는 팝 음악계는 10대 틴에이저들이 등장하여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Paul Anka, Frankie Avalon, Fabian, Ricky Nelson, Bobby Darin, Bobby Rydell 등이다.
그가 없는 공백 기간 동안 팝 흐름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팝음악을 주도해온 Jerry Lee Lewis, Little Richard 등의 강렬한 록 음악은 색채가 약해지고 10대들이 리드하고 있는 새로운 패턴인 록 발라드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엘비스 팀들은 이 새로운 물결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도 변화를 이루고자 다방면에서 검토를 시작했다. 터프한 록음악에서 탈피하여 소프트 록으로 전환하며 또 한편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던 가스펄 음악(복음 성가)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수 십년 동안 수없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가스펄 뮤직에 도전 했지만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복음 성가는 기독교 신도들만 애호하는 그들만의 음악 분야이라서 신앙심이 깊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신을 찬양하는 기독교 복음 성가를 팝 팬들에게 전달코자 엘비스 팀은 모험에 도전할 계획을 세워 레코딩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거대한 장벽을 허물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생겼다. 아마 그건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시대의 풍운아 그만이 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1960년 10월30일과 31일 이틀 간 테네시주 내쉬빌에 있는 RCA 스튜디오에서 강행군 속에 녹음을 했다. 저녁 6시에 시작한 녹음 작업은 새벽 3시에야 끝날 수 있었다. 엘비스는 완벽하기 위해 재녹음을 원했지만 모두가 더 이상의 기력이 없어 녹음 작업을 마쳤다. 그렇게 힘든 작업을 마친 앨범을 His Hand In Mine이란 타이틀로 세상에 내놓았다.
LP 레코드로 발매를 했지만 싱글 레코드로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음악 소유권자와 로열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년이 흐른 1965년에 드디어 앨범 레코드 노래 중 Crying In Chapel을 싱글 레코드로 세상에 발표했다. 이 노래는 빌보드 차트 3위까지 올랐으며 레코드 판매 실적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여 예상외의 성과를 이뤘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성과는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팝 팬들에게도 애호를 받은 점이다. 팝 팬들에게는 생소한 분야인 복음성가를 접하게 만든 계기를 제공했다는 그 자체에 엘비스의 팬들의 환영을 받았고 또한 음악 평론가들이 엘비스의 시도에 찬사를 보냈다. 이후 많은 아티스트들이 복음성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칸츄리 가수들이 이 분야에 활발히 개입하여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음악 전문지 빌보드도 이에 호응하여 복음성가 분야를 새로운 장르로 인정하여 인기 순위를 매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드디어 복음성가도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복음성가 음악을 발표한 것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어릴적 꿈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어릴 때 부터 부모님과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성가를 부르면서 자연히 그 노래들과 친숙한 유년 시기를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항상 어릴적 교회에서 부르던 노래들을 회상하고 동경했었다. 그는 그런 음악들을 취입하고 싶었지만 그가 데뷔할 당시에는 결렬한 록 음악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시절이었고 또 한편 본인도 신인 시절이라 음반회사에 요청할 입장도 아니었다. 데뷔 후 2년간의 성공과 2년 간의 군 복무 기간동안 그의 위치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젠 음반 회사내에서도 그의 입지가 확고해졌다. 제대하자마자 그는 회사에 복음성가를 취입하게다고 선언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그 누구도 그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의 요구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기 그렇게도 원했던 복음성가풍인 Crying In The Chapel이 우리들 곁에 다가서게 되었고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세대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한동안 우리들 마음을 편안하게 인도해주었다. 이 노래의 성공으로 향후 2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새로 발표하여 복음성가를 대중화 하는데 앞장을 섰다. 자! 눈을 살며시 감고 노래를 들으면서 노랫말 가사처럼 감사를 드리며 기쁨의 눈물을 만끽하면 어떨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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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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