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세금 보고 시즌이 돌아왔다.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는 때, 새로움으로 가슴 설레이기 좋을 때, 지난해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내 가정의 재무 담당자인 나는 세금 보고 프로그램을 써서 매년 세금 보고를 한다. 프로그램은 인적사항으로 시작한다. 인적사항 중 하나가 직업이다.
2001년부터 20년간 한 직장을 다닌 나는 매년 같은 정보를 입력했었다. 2021년 세금 보고를 하며 나의 직업란에 이제까지 저장돼 온 것을 삭제했다. 2020년 말에 조기은퇴한 후 집에서 지내는 것 외에는 소득을 발생하는, 일정한 일을 하지 않는 나는 직업이 없으니 빈칸으로 남긴 것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내 직업란의 정보가 없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에러 메시지를 냈다.
순간 나는 ‘직업이 없는 가정주부는 뭐라 입력을 할까?’ 생각하며, 2017년에 <도넛 경제학> 책을 출간한 후 내가 근무하던 세계은행 본부에 와 강연을 한 케이트 레이워스 (Kate Raworth)가 한 말을 떠올렸다. “20세기 경제학은 자본, 생산과 소비만 강조하고 끊임없이 GDP와 소득을 높이려는 일직선 경제개발 모델이었죠. 사람이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것들이 그런 일직선 경제개발 모델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여성의 가사노동을 들 수 있죠. 장시간, 힘겨운 노동을 하고, 그 가치가 각 가정에 절대적이지만, 경제활동에 포함되지 않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활동인 것이었죠.”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선 기존의 모델을 쓸모없게 만들 새로운 모델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 벅민스터 풀러 (Buckminster Fuller)의 말을 인용하며, 그녀는 자신의 도넛 경제학 모델을 제시했다. 이제까지 한정된 모델에서 벗어나 삶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토대와 경제활동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재생과 회복의 순환 경제 모델을 그린 것이다. 사회적 토대를 깨끗한 물, 식량, 보건, 교육, 소득과 일자리, 평화와 정의, 표현의 자유, 성 평등, 사회적 공평함, 주거, 에너지, 각종 네트워크 등 12항목으로 작은 원을 그려 나누고 기후변화, 해양 산성화, 화학적 오염 등등의 생태적 한계를 큰 원의 바깥에 배치해 생태적 한계를 넘지 않으면서 필요한 사회적 토대를 형성하는 도넛 모양의 경제모델이라 도넛 경제학이라 명명했다.
한 나라의 경제활동을 GDP와 소득이라는 수치로 획일적으로 드러내듯, 매년 꼬박꼬박 신고해야 하는 세금 보고는 한 개인 삶의 경제활동을 수치로 드러낸다. 한국에서 개인의 종합소득세 신고는 5월 말이었는데, 미국의 개인소득세는 4월 15일이 기한이다. 올해는 4월 15일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금요일이어서 그 기한이 4월18일이 되었다. 왜 4월 15일을 미국의 세금보고일로 정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항상 세금 보고를 준비하는 시점이 부활절을 앞두고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준비하는 사순절과 겹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혹은 ‘빵 두 조각이 있으면 한 조각은 수선화와 바꾸어라. 빵은 몸에 필요하나 수선화는 마음에 필요하다’라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듯. 사회가 GDP만으로 충족되지 않듯, 삶은 빵만으로 채워질 수 없다.
“직업(職業)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을 말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먹고 살려면 누구든 직업을 가져야 한다.” 한국 나무위키 사이트에서 정의하는 직업이다. 먹고 살기 위한, 빵을 벌기 위한 행위로서의 직업. 세금 프로그램에서 사용한 단어 ‘Occupation’ 역시 일정 기간의 수련을 거쳐 규칙적으로 행하는 일을 뜻한다. 직업을 갖고 있는 동안은 수선화를 바라볼 시간이 없어 나는 직업을 놓았다. 빈칸으로 남아있는 나의 ‘Occupation’ 너머로 창밖에 핀 수선화가 눈에 들어온다. 유난히 봄이 더딘 올해는 4월이 되어서야 수선화가 피기 시작해 노란 꽃이 마당 곳곳에 피어있다. 여전히 나뭇가지들은 앙상하고 날은 추운데 홀로 수선화는 꼿꼿이 찬 바람을 맞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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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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