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애쓰며 살아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고 또 돌아볼수록 삶은 썼다가 지워버린 연필 자국처럼 희미하기만 하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처럼 매일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신화 속의 시시프처럼,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지우는 인생이라는 그 고단하고도 먼 길… 지난 4월1일은 라흐마니노프의 149회 생일이었다. 하루종일 FM에서 흘러나오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이 마치 회색 하늘처럼 어둡고 음산하게 마음 한구석을 적셔온다. 깊은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절망감, 자기 연민에 빠진 듯 어두운 선율미... 그렇기 때문에 또 창문을 때리는 봄비처럼 위로와 도전을 안겨주는 음악.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 스타로르스키에서 태어나 194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 후기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 차이코프스키가 휩쓸고 간 러시아 음악의 뒷뜰을 쓸쓸하게 지켰으며 교향곡 1번의 실패 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내놓으면서 재기한다. 8년 뒤 3번을 내놓아 다시 주목을 받았고 뒤어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등으로 피아노 분야에 관한한 러시아 후기 낭만파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존재로 남게된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다소 염세적으로 들려오긴 하지만 조용히 듣고 있으면 왠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같지 않은 솔직, 진솔함이 느껴져 온다. 오히려 글이나 이야기로는 대신할 수 없는 위로의 속삭임이 있다고나할까. 감정의 솔직함, 아련한 시름 속에서도 한 줄기 낭만의 빛줄기가 깊은 심연의 최면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키 6피트 6인치.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만큼이나 컸던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거인같이 손으로 어마어마한 기교적 난이도를 과시한 작품으로 20세기 피아노 협주곡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한국인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의 1위곡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꼽힌 바 있으며 서구권에서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늘 ‘톱 3그룹’ 에서 내려오는 법이 없다. 메타포적(은유적) 선율미의 상징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다른 낭만주의 음악들과는 달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만큼 강하게 억눌려있으면서도 피해의식으로 가득 찬, 도시인들의 방랑을 심도깊은 우울로 표현한 작품도 없다할 것이다. 특히 2번 같은 경우는 발표 직후의 열광적인 호응에서 엿볼 수 있듯이 20세기 최고의 작품 중의 하나로서, 1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대중과 가장 친숙한 작품 중의 하나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쇼팽, 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작품으로 대변되는 피아노 협주곡은 슈만,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등을 거치면서 그 규모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으며 그리그, 라흐마니노프 등에 이르러서 그 완성도에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세계 5대 피아노 협주곡하면 흔히 베토벤(5번), 차이코프스키(1번), 쇼팽(1번) 그리고 그리그의 협주곡(A단조), 라흐마니노프(2번) 등을 꼽는 것도 이런 이유다. 물론 음악의 선율미나 규모보다 은유적인 속삭임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모차르트의 협주곡들과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3번 등을 더 찾게 되지만 사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베스트의 1, 2위가 모두 교향곡이 아닌 피아노 협주곡(라흐마니노프 2번, 베토벤 5번)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곳 미국에서도 ‘인기 클래식 100위’안에는 피아노 협주곡이 무려 10곡 이상이 포진해 있다.
사람들은 왜 피아노 협주곡을 좋아할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음악의 메타포적인 요소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밝음 속에서의 어두움, 어두움 속에서의 밝음이 동시에 내재된 것이 음악이기도 하고 여리고 부드러운 선율 속에서 강한 감동의 기운이 용솟음치기도 하며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치유를 주는 수수께끼같은 속삭임을 들려주는 예술. 굳이 알려고 하면 멀리 도망가고 마음을 비운 채 귀를 열고 흘러가는 대로 듣고 있으면 또 다가오는 것이 음악이다. 특히 피아노의 소리는 건반음이 주는 긴 여운때문인지 선율적 감흥보다는 시적인 감흥으로 더 사람의 귀를 자극하곤 하는데 특히 피아노 협주곡의 경우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마주치면서 일으키는 묘한 선율적 감흥이 그 감동의 궤적을 더 깊고도 길게 이끌어 가곤한다. 서양 음악에서 피아노가 빠진 음악이란 김빠진 맥주나 다름없다.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도 이러한 반향을 일찍이 꿰뚫고 있었는지 피아노 협주곡 분야에서만도 무려 27곡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다. 바로크의 바하, 비발디, 텔레만 등에서부터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등 현대 작곡가에 이르기까지 피아노 협주곡 분야가 남긴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꼭 라흐마니노프의 생일때문이 아니라 벚꽃이 흩어지는 계절에, 봄비처럼 촉촉히 젖어오는 음악의 밀당… 사라질 듯 다가오며 또 다가오는 듯 멀리 사라져 가는 피아노의 매혹적인 선율… 모차르트의 협주곡 ‘엘비라 마디간’, 라흐마니노프의 세계로 한번 빠져가 보자.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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