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개암사와 울금바위, 내소사와 곰소항부안 변산 동쪽의 개암사와 울금바위. 변산반도국립공원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시인 이매창과 백제 부흥군 등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곳이다. 전북 부안에는‘생거부안’이라는 표현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부안은 어염시초(魚鹽柴草)가 풍부해 부모를 봉양하기 좋은 땅’이라고 보고했다는 데서 유래를 찾는다. 물고기·소금·땔나무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고루 갖춘 땅이라는 의미다.
■쪼개진 울금바위 아래 고즈넉한 개암사
외지인에게는 부안보다 변산반도가 익숙하다. 수려한 자연과 풍성한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변산은 전라남북도를 가르는 노령산맥의 끝자락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홀로 뚝 떨어진 변두리 산으로 국내 유일의 반도형 국립공원이다. 내변산의 직소폭포와 의상봉, 외변산의 채석강과 적벽강 등 안팎으로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변산 동쪽 상서면에 개암사라는 사찰이 있다. 뒤쪽 봉우리에 울금바위가 상투처럼 솟아 있는데, 대웅전 앞마당에 서면 둘로 갈라진 것처럼 보인다. 절의 명칭은 바로 이 바위에서 유래한다.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 왕사가 변한의 궁궐을 절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나름 ‘천년 고찰’인데 긴 역사에 비하면 덜 알려진 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중건했고, 1913년에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개암사중건사적’에 따르면 고려 숙종 때 절을 크게 고쳤다고 한다. 황금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청연각, 서쪽에 백옥교, 남쪽에 청허루가 있었고, 경내의 연못에 꽃과 대나무가 비쳐 마치 극락 세계와 같았다고 한다.
소규모 대숲을 빼면 지금의 개암사는 기록상의 배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전나무숲을 통과해 다리를 건너면 사천왕문이 시야를 가린다. 문을 통과하면 다시 근래에 지은 거대한 2층 문루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뒤쪽 산 능선과 절 이름의 유래가 된 울금바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건축에 문외한이라도 아쉬울 수밖에 없는 가람 배치다.
절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도 마찬가지다. 곱게 단청한 ‘대웅보전’ 현판 위에 도깨비 두 마리가 보인다. 잡귀나 재앙을 막기 위한 일종의 귀면(鬼面)이다. 단청을 하기 전 오른쪽 도깨비는 시선을 돌려 우측을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는데, 지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귀면이 아니라 귀여운 새끼 호랑이처럼 보인다.
개암사는 부안을 대표하는 시인 이매창의 ‘매창집’을 목판으로 간행한 곳이기도 하다. 입으로 전해오던 그의 시 58편을 엮은 시집이다. 부안의 아전들이 그것도 사찰에서, 죽은 지 58년이 지난 기생의 시집을 간행했다. 작품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만큼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매창(1573∼1610)은 기생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부안 현리였던 이양종의 서녀였다고 한다. 부친에게 한문을 배웠고, 시와 글씨가 뛰어나 황진이에 버금가는 조선시대 여성 시인으로 꼽힌다.
동료 시인인 유희경과의 인연은 그의 대표작 ‘이화우(梨花雨)’로 남았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유희경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한 시기가 아마 오얏꽃 피던 봄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사찰에 이매창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길을 따라 왼쪽으로 돌면 쏟아질 듯한 바위 아래에 커다란 굴이 파여 있다. 이름하여 ‘복신굴’이다. 백제 부흥군의 장수 복신이 은거한 굴이라는 의미다. 의자왕 20년(660) 백제가 멸망하자 그의 사촌 복신과 승려 도침 등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백성들을 모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울금바위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우금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백제 부흥군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주류성이다.
결과적으로 백제 부활의 꿈은 내부 분열로 막을 내린다. 주류성에서 복신은 경쟁자인 도침을 살해하고, 왕권의 위협을 느낀 풍은 복신을 제거한다. 부흥군의 또 다른 근거지인 예산 임존성에선 흑치상지 장군이 당에 투항하고, 거꾸로 부흥군을 공격해 무너뜨린다. 오합지졸의 부흥군이 김유신과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에 맞서기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울금바위에서 가파른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는 다소 아쉽다. 주류성 방향은 가파르고 험해 접근할 수 없고, 등산로는 반대편으로 이어진다. 개암사를 둘러싼 산줄기를 한 바퀴 돌아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약 4㎞ 코스다. 산자락을 우회하는 완만한 내리막이어서 1시간가량 걸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우측으로는 내변산의 아기자기한 산세가, 좌측으로는 부안의 넓은 평야가 내려다보인다.
■짜임새 있는 내소사, 짭조름한 곰소항개암사에서 멀지 않은 진서면 변산의 또 다른 골짜기에 내소사가 있다. 부안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일등공신은 사찰 입구에서 경내에 이르는 약 700m 전나무 숲길이다. 무더운 여름이면 산산한 그늘을 드리우고, 흰눈 내리는 겨울이면 더욱 운치를 더하니 언제라도 좋은 길이다. 평지 사찰이지만 깊은 산중에 든 것처럼 아늑한 것도 이 숲길 덕분이다.
내소사는 오랜 기간 마을 주민과 화합을 다져온 사찰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절 입구와 대웅전 마당에 수령 1,000년으로 추정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한 그루씩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나무로 불리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는 당산나무다. 매년 열리는 당산제에는 주민들과 내소사 승려들이 함께 참가해 평온을 기원한다고 한다.
내소사는 개암사보다 한 해 빠른 633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관음봉 아래에 차분하게 안긴 절간의 모습도 개암사에 비하면 짜임새 있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화려한 단청이 없어 수수해 보이지만, 불교 미술의 아름다움과 부처의 가르침을 동시에 품고 있다. 나뭇결이 살아 있는 꽃문살은 자체가 뛰어난 공예품이고, 나무조각 하나가 빠진 천장 기둥은 비움의 미학을 가르친다.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완성했다는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살아 있는 듯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대(大)’ 자는 사람이 두 팔과 다리를 벌린 모양에서 진화해 곧장이라도 걸어갈 듯 생동감이 넘친다. 승려들의 거처인 바로 옆 설선당(說禪堂) 현판 역시 춤을 추듯 현란하다. 건물은 화려하지 않아도 주변 경관은 계절 따라 화사하고, 넘치지도 않지만 모자람도 없으니 한결같이 사랑받는 사찰이다.
내소사에서 바닷가로 나오면 짭조름한 젓갈 내음이 풍기는 곰소항이다. 곰소는 예부터 칠산바다의 온갖 해산물이 모이는 곳이었다. 곰소의 소는 물웅덩이가 아니라 고창과 부안 사이의 바닷길, 곰소만이다. 간조 때는 그 넓은 바다가 갯벌로 변신하니 물고기뿐만 아니라 조개까지 풍성한 항구다. 곰소젓갈시장에는 새우젓 갈치젓 멸치젓은 기본이고, 바지락젓 어리굴젓 (명태)아가미젓 소라젓까지 바다에서 나는 모든 젓갈이 모여 있다.
곰소항의 식당마다 3~4가지 젓갈이 기본 반찬으로 나오니 따로 젓갈백반을 시키지 않아도 된다. 곰소항의 특이한 음식 중 하나는 풀치다. 꾸덕꾸덕하게 말린 갈치를 조려 내는 음식이다. 말리는 모양이 꼭 풀처럼 휘어져 있어서 이렇게 부른다고 하는데, 실제 풀치는 갈치 새끼라는 뜻이다.
곰소만의 가장 안쪽 줄포에는 대규모 갯벌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저지대 침수에 대비하기 위해 제방을 쌓아 조성한 공원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담수 습지는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물길이 되었고, 약 66만㎡(20만 평)의 광활한 갈대밭으로 낸 10리 산책로는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해질 무렵 운치가 그만이다. 주목을 끌었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세트는 철거됐고, 그 자리는 야생화 동산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사실 ‘생태와의 단절’로 출발한 생태공원이지만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며 이제야 이름에 부합하는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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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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