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동 작은 엄마는 얼마전 위암 때문에 위를 절제한 뒤로 미음만 간신히 드시고 계시고, 그 위 괴정 작은엄마도 범어사 부설 노인 유치원에 다니고 계시는데 건강이 여의치 않으신 모양이야. 두분 다 구십 세이시니..’ 그래서 돈을 보내 드렸어.
어린시절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어쩌다 뵙게 되면 그렇게 따스할 수 없는 자애로운 미소로 우리를 대해 주시던 작은엄마들을 마지막으로 뵌 지가 벌써 몇십년째 인지 모른다. 한국 살 때도 작은 집들의 소식은 간간이 바람결에 들려올 뿐이었고,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온 지도 어언 이십 년, 어쩌다 한국엘 가더라도 짧은 체류기간 동안 일일이 찾아 뵙고 합당한 예를 갖춰 인사를 드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던 것이다. 막내 넷째 숙모는 아직 팔순이 안되신 데다 경남상고 야구선수 출신의 장대한 기골의 삼촌이 80초반의 연세에도 아직 건재 하시니 위의 두 작은엄마들 보다는 아직 덜 쓸쓸하실 것이다. 새해를 맞아 어릴 적 작은 엄마들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모락모락 피어 올라 김해사는 큰 누이에게 맛있는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라며 오십 만원을 보냈더니 누이가 카톡 전화로 전해준 이야기 이다.
종손부인 여섯 살 위의 우리 엄마를 항상 ‘형님, 형님’ 하며 공경하던, 집안의 셋째 서열인 대신동 작은 엄마에 대한 확실한 기억은 지금으로 부터 48년전인 1975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겨울방학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처럼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던 한국의 추운 1월의 어느 날 이었다. 작은집의 장남인 수환형이 서부전선 최일선인 연천군 백의리에서 육사 8기의 선두주자로 명성이 자자했고, 육사 동기인 고 노태우 대통령의 영부인이 된 김옥숙 여사의 오빠로도 유명한 김복동 사단장 휘하의 예하부대에서 신병생활을 할 때 작은 엄마와 함께 면회를 갔던 특별한 날의 기억이다.
내 또래의 사촌들과 함께 부산에서 통일호 특급열차를 타고 시루떡 한시루와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바리바리 준비해 오셔서는 돈암동 우리집에서 하루를 주무신 다음날 아침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 시외버스를 타고 면회를 갔던 것이다. 지금이야 자유로가 시원하게 뚫려 문산 임진각까지 서울에서 1시간이면 달려갈 수 있지만 당시엔 1호선 지하철만 겨우 개통됐을 때라 돈암동에서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가는데 만도 최소한 1시간에다.
연천 전곡 금촌 파주 봉일천 등 일선지역을 오가는 시외버스를 문산에서 또 갈아타고 어찌어찌 가느라 지금 기억으로는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려서 부대에 닿았던 느낌이다. 방앗간에서 막 쪄내자 마자 경부선을 타고 오느라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시루떡과 약과, 잡채, 귤, 삶은 계란, 통닭 등속을 넣어온 보따리를 작은엄마가 위병소 옆 PX 건물의 한 켠에 마련된 면회실의 탁자위에 풀자 자대 배치 받아 6개월 정도 지나 검게 탄 얼굴로 군기가 바짝 들어있던 김수환 일병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터졌다. 이내 목이 메일 때마다 칠성사이다를 벌컥벌컥 마시며 시루떡 부터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형을 따라 나도 간만에 특식을 먹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했는지 모른다.
군에 보낸 지 6개월만에 일선의 면회소에서 큰 아들을 해후해 바라보는 40대 초반의, 부산의 명문 여고중의 하나인 N 여고의 응원단장 출신의 아주 활달한 미인이어서 우리들 에게도 큰 자랑이었던 작은 엄마의 시선엔 짠한 마음이 한가득 묻어난다. 부산 유력 일간지인 국제신보의 법조 출입기자였던 작은 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자라 부산 최고의 명문인 K중을 다녀 역시 온 집안의 자랑이었던 형은 대입 재수를 위해 큰집인 돈암동 우리집에서 1년여 지내며 종로의 대입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사촌인 우리들과 정도 많이 들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입대를 하였던 것이다.
올려 논 보리차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던, 면회객들로 북적 거리던 난롯가 옆 테이블에서 작은 엄마가 그래 힘들지 않냐고 측은한 표정으로 물으니 겨울 땡볕에 부대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타작마당 시골 머슴 처럼 검게 탄 김일병의 흥미진진한 군대 이야기 보따리가 약간의 과장을 담아 좔좔 풀어졌다. 형의 병영 무용담이 어느 대목에 이르렀을 때, 나는 ‘모야 불과 3~4년후면 나도?’ 하는 생각에 몸서리 치게 되었다. 지금도 생생한 그 내용은 이랬다. 병영의 청소상태를 점검하던 고참들의 신병들에 대한 얼차려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누군가 막사주변에 급한 볼일을 본 흔적을 발견하고는 ‘좋은 말 할때 자수하라’며 닥달을 하더란다. 시퍼런 서슬에 겁을 먹고 아무도 나오지 않자 급기야 그 고참병은 역겨운 그걸 야전삽으로 파서는 물이 가득찬 드럼통에 휘휘 젓더니 모두 한 바가지씩 마시라고 해서 마셨다는 거다. 오마이 갓. 요행인지 나는 그런 막장 한국군 드라마를 겪지 않고 군생활을 마칠 수 있었으니 천지신명께 감사할 따름이다.
작은 엄마님들, 접니다. 며칠후면 설날이네요. 부디 오래 오래 사시기 바랍니다. 임인년 새해 복들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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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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