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조조정 등 자립 역할 외면, 돈 퍼주는 원조기구로 변해
▶ ‘빚더미’ 30여개국 중복 지원, 부패 국가에도 조건 안달아…채무국 모럴해저드 부추겨 “신흥국 위기 방치” 쓴소리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 [로이터]
지난 1990년대 우리나라 외환위기 당시 구제금융을 대가로 혹독한 구조 조정을 요구했던 국제통화기금(IMF)이 정체성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지나친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성으로 불평등 문제로 관심을 돌린 IMF가 부채가 급증한 나라에 조건 없이 자금을 지원하는 등 ‘인간적인’ 기관으로 변신을 시도해온 것이 ‘긴축의 시대’를 맞아 다시 비판의 도마에 오른 데 따른 것이다. 구조 조정 등을 통한 채무국의 변신을 돕기보다는 원조에 치중함으로써 되레 ‘긴축 발작’ 리스크에 노출된 신흥국의 위기를 방치하고 있다는 쓴소리가 나온다.
◆‘산타클로스’변신에 모럴 해저드
19일 미 금융가에 따르면 IMF 수석이코노미스트였던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프로젝트신디게이트에 기고한 ‘왜 IMF는 원조 기구가 되려 하는가’라는 글에서 “IMF가 채무 국가들의 자립을 돕는 전통적 역할을 경시하고 원조 기구로 변모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로고프 교수는 “IMF가 ‘스크루지’에서 ‘산타클로스’가 되려고 하는 게 문제”라고 혹평했다. 그에 따르면 IMF는 세계경기 침체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위기 속에서 최근 수년간 향후 정상화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나라들에까지 막대한 자금을 제공해왔다. 실제 IMF로부터 신속 금융 지원 등 2개 이상의 지원을 받는 국가는 미얀마·우즈베키스탄·카메룬·탄자니아 등 30여 개국에 이른다. 팬데믹 대응과 관련해서도 에콰도르 71억 달러, 나이지리아 34억 달러를 지원하는 등 적극적이다. 문제는 지원국 중 부패가 만연한 나라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자금 지원에 어떤 부대조건도 달지 않아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점에 있다.
시장에서는 IMF가 지원 영역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로고프 교수는 “최근의 IMF 지원을 보면 치솟는 부채 수준, 인플레이션 가속화, 은행 문제 등을 고려하지 않고 신흥 시장에 너무 낙관적인 측면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IMF가 ‘대출 기관’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디폴트(채무 불이행)가 이어지면 선진국들이 우물(재원)을 다시 채우지 않는 한 IMF도 파산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IMF 내부서 자성 목소리 나와
특히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출이 승인된 2018년의 아르헨티나 구제금융은 ‘예측 가능한 위험’조차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 IMF 스스로 내린 평가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IMF는 지난해 말 아르헨티나와의 협정과 관련한 장문의 보고서를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아르헨티나의 구조적 취약성을 IMF가 간과했다는 비판이 담겼다. “노동자의 15%만이 소득세를 내고 금융시장은 취약하며 협정 당시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 약해 경제적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간과하고 돈을 풀었다는 것이다.
실제 아르헨티나는 2018년 IMF로부터 500억 달러(추후 570억 달러로 확대)의 대출을 승인받으며 중앙은행의 역할 강화를 통한 물가 및 페소화 안정, 외국인투자가 신뢰 회복 등을 약속했지만 어느 하나 지키지 않다가 또다시 디폴트 위기에 직면했다. IMF는 “협정 초기부터 채무 조정과 강력한 자본 유출입 통제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많은 신흥국가들이 IMF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특정 국가에 IMF가 너무 많은 자금을 지원한 것도 문제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 긴축 시대 맞아 역할 정립해야
문제는 미국발 긴축이 불러올 파장이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사진) IMF 총재는 최근 “각국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세계경제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특히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인플레이션과 부채가 최대 난제”라며 “올해 남미·중동 등에서 사회불안이 재연될 수 있다”고까지 했다. IMF가 부채 경고음이 울린 신흥국의 위기를 관리하는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전문가들은 미국의 급격한 긴축이 신흥국의 통화·주식가치 폭락 등을 유발하는 ‘긴축 발작’으로 이어져 다시 글로벌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로고프 교수는 “연준이 금리를 크게 인상하기 시작하면 누가 신흥국의 불가피한 재정적 혼란을 정리할 것이냐”며 “전염병이 사라지지 않듯이 전통적인 IMF의 역할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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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윤홍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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