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들이 2주간의 휴가를 받아 집에 왔다. 해마다 가족여행을 하며 보내는 특별한 시간이어서 올해에도 몇 달 전부터 COVID 상황이 좋아진 나라를 찾아 예약을 하고 기대에 차 있었는데 오미크론이라는 새 변종이 다시 유행하는 바람에 마지막 순간에 포기해야 했다. 미국내에서 갈 수 있는 여행지를 찾아보았으나 이미 다녀온 곳이거나, 예약이 쉽지 않은 곳 들이어서 아이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Staycation을 하자고 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지만 모처럼 두 아이와 함께 집에서 보내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주변에는 데이 트립이 가능한 곳이 참 많았다. 아내와 자주 다니던 바닷가 공원을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휴가지에서 보내던 시간을 떠올렸고, 무심코 지나치던 곳에서 찾아낸 맛집에서의 저녁식사도 좋았다. 아이들과 돌아가며 하루를 계획하고 함께 요리도 해 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날, 큰 아이의 계획에 따라 산행을 하기로 했다. 겨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포근한 날씨였으나 이른 아침에 지나간 가랑비 탓에 조금은 망설여졌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의미를 부여한 아이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차고에서 몇 해 전에 선물했던 등산 스틱을 찾아내 손에 쥐어 주었다. 오늘의 코스는 계곡을 따라 산 정상에 오르고 그 정상에서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는 루프 트레인이고 계곡과 산을 함께 볼 수 있는 썩 괜찮은 하이킹 코스라고 했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며칠 전 큰 비가 내린 탓에 흙이 흘러내려 위험해 보였다. 선두에 선 작은 아이가 ‘조심’ 이라고 외치면 후미를 맡은 큰 아이가 ‘조심’ 이라고 답을 했다. 아이들의 소리는 산에 부딪쳐 다시 돌아 오지는 않았지만 위험한 비탈길을 만나도 깊은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새 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바위산을 힘겹게 건너갈 즈음 물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다. 숨을 들어 마시면 산이 품었던 모든 생명의 냄새가 가슴 속 가득히 들어왔다. 계곡에 다다라서야 작은 평지가 보였다. 맑은 물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긴장 뒤에 오는 안도감이 따뜻해서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하늘을 보던 작은 아이가 눈이 올 것 같다며 서둘러 이 계곡을 빠져 나가야 한다고 했다. 큰 아이가 메아리가 되어 맞장구를 쳤고 아내와 나는 아이들 말을 따르기로 했다.
산을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음은 한 발 짝 앞서 갔으나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를 않았다. 내가 일행에서 뒤처지자 맨 뒤에서 우리를 보호하며 따라오던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불러 세웠다. 평평한 바위를 찾아 앉아 숨을 고르며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 봤다.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길을 찾아 그 곳에 와 있었다. 또한 우리가 길이라 믿고 지나쳐 온 길은 나무 뒤에 숨어 숲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제 나무에 새겨진 오렌지 표식만이 우리 앞에 보이는 유일한 출구였다. 그러나 그 길은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 이어진 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매우 먼 길처럼 느껴졌다.
길은 보이지 않았으나 걷다 보면 그 곳에 길이 있었다. 오르막 이라 생각하면 이내 길은 내리막으로 연결 되었고 곧은 길이라 방심하면 이미 길은 굽어 긴장하게 만들었다. 물이 끊어 놓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다시 물이 만들어 놓은 길로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네사람이 같은 길을 나란히 걷고 있으나 네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멀리 산 위의 나무 끝에 걸린 잿빛 하늘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 하늘이 곧 우리 쪽으로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는지 앞장선 작은 아이의 보폭이 조금씩 빨라졌다. 산새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산 새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잿빛 하늘 아래 나를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내 뒤를 따라오던 큰아이의 서두르자는 말에 생각이 끊기며 나도 빠른 걸음으로 아내를 따랐다.
지나간 길은 이내 다시 숲이 되었고 숲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산이 되어갔다. 마침내 트레일이 시작됨을 알리는 표식 나무가 보였고 그 나무에는 우리가 다녀왔던 오렌지 표식과 우리가 가지 않았던 블루 표식이 나란히 붙어 다른 길을 향하고 있었다. 블루 트레일을 택했더라면 어땠었을까를 잠시 생각했다.
휴일이라고 며칠 면도를 미룬 탓에 턱수염이 하얗게 자랐다. 그동안 감추고 살았던 흰머리가 하얀 턱수염과 묘하게 대비되어 거울 맞은편에서 어색하게 웃는다. 어쩌면 감추고 싶었던 흰머리도 감추지 못한 흰 턱수염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남들보다 부족한 재능, 힘들다고 여겼던 하루, 사려 깊지 못한 나, 돌이켜 보면 늘 내 삶의 기준에 남이 앞섰다. 이제 나를 중심에 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 들이고 싶어졌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며 치열하게 걷던 한 해를 뒤로하고 새 해의 첫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한걸음 더디 걷더라도 마침내 도달할 그 곳을 향해 묵묵히 길 하나를 새로 만든다. 마침내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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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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