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실의 역사 속 와인 - 독일우수와인생산자협회
2007년, 미국에서 살 때의 일이다. 영화관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고 있었다. 영화는 2시간 38분 내내 음산하고 불길해서 사람을 바짝 긴장시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촉각을 곤두세우며 보고 있는데 팝콘 씹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와작와작. 심기가 불편해져 돌아보니 양 옆에 앉은 두 사람 모두 팝콘을 동시다발적으로 씹고 있었다. 와작와작, 와작와작와작. 아, 이런 영화를 보면서도 굳이 팝콘을 먹어야 한다니. 좌절스러웠지만 그들의 권리이므로 존중 받아야 마땅했다. 결국 내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빈자리로 옮겨 영화를 마저 보았다.
얼마 전 한 시음회에 참석했다. 자타 공인 세계 최고의 리슬링 와인을 만드는 독일의 와인 메이커 에곤 뮐러(Egon Mller) 시음회였다. 에곤 뮐러 레이블이 붙은 와인 병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독일에는 우수와인생산자협회(VDP, Verband Deutscher Prdikatsweingter)라는 단체가 있다. 가슴에 포도송이를 품은 독수리가 이들의 상징이다. 병목과 레이블에 이 마크를 인쇄한다. 에곤 뮐러 역시 VDP 회원이다.
에곤 뮐러 와인 병을 찬찬히 살폈다. 그런데 레이블과 병목에 인쇄된 마크가 여타 VDP 와인과 달랐다. 병목에 에곤 뮐러의 독특한 문장만 있을 뿐 독수리 마크가 보이지 않았다. 레이블 표기도 달랐다. 보통 독일 최고급 와인의 레이블에는 마을 이름에 ‘er’를 붙이고 포도밭 이름을 연이어 적는다. 예를 들면, ‘Zeltinger Sonnenuhr’는 ‘첼팅 마을의 조넨우어 포도밭 와인’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에곤 뮐러 레이블에는 마을 이름이 없었다. ‘샤츠호프베르크 포도밭 와인’이라는 뜻으로 ‘er’가 덧붙은 이름 ‘Scharzhofberger’만 달랑 표기돼 있었다. 에곤 뮐러의 셀러에서 직접 와인을 가져온 와사향(와인을 사랑하는 향기로운 사람들 동호회)의 ‘와인지기’ 님과 시음회를 주관한 ‘Felona’ 님에게 까닭을 물었다. 이들에 따르면, 최근에는 협회 로고 대신 자신들만의 표지를 사용하는 생산자들도 있다. 에곤 뮐러처럼 특등급 포도밭의 와인일 경우 마을 이름을 빼고 밭 이름만 표기하기도 한단다.
■독일 민간 와인협회의 깐깐한 기준
VDP는 1910년 설립됐다. 독일 13개 와인 산지의 200여 와이너리가 가입돼 있다.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 공동으로 품질을 보장하고 홍보를 하려는 목적에서 협회가 설립됐다. 이 협회는 법적 공식기관은 아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누구나 인정하는 실력 있는 와이너리들의 연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가입이 까다롭다.
원산지와 품종의 특성이 와인에 반영될 수 있도록 자기 소유의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 또 포도밭 전체 면적의 70% 이상은 리슬링이나 슈페터부르군더(피노누아) 같은 독일 전통 품종을 심어 재배해야 한다. 현재 VDP 와인은 독일 전체 와인의 약 4%밖에 안 된다. 그만큼 품질이 보장된다.
협회에서는 1971년 제정한 독일와인법으로는 커버하지 못하는 중요한 기준을 만들었다. 바로 ‘원산지’ 개념의 등급 체계이다. 독일 와인법에서는 포도의 ‘당도’를 기준으로 최고급 와인의 등급을 가른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프레디카츠바인(Prdikatswein) 등급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등급 기준을 당도로 삼은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독일의 기후 조건에서는 포도의 당도가 쉽게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수저계급’ 체계와 다른 독일 와인
생각해보면, 프랑스 보르도의 메독이나 부르고뉴에서는 샤토나 포도밭에 고릿적 부여한 등급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덕분에 포도 품질과 상관없이 와인 등급은 이미 정해져 있다. 물론 이 탓에 아무리 노력해도 정해진 등급을 넘을 수도 없다. 적어도 ‘와인 계급’에 있어서 프랑스는 아직 중세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반면 독일의 등급 체계는 수확한 포도의 성숙도를 검사해 등급을 정한 것이다. 노력한 만큼 등급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공정하고 합리적인가. 그런데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원산지를 기준으로 등급 체계를 세운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등급 기준과 체계가 다르다 보니, 외국인들이 보았을 때는 독일 와인의 기준이 외려 혼란스러웠다. 상품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는 굉장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VDP에서 새로운 등급 체계를 만든 까닭이 여기에 있다.
VDP는 협회 회원들의 포도밭만이라도 프랑스 부르고뉴처럼 테루아르 개념을 적용해 등급을 구분했다. 포도밭 분류 작업은 약 10년 동안 진행되어 2012년 빈티지부터 다음과 같은 새로운 등급 체계를 적용했다.
■온난화 영향받는 와인
VDP는 또 다른 보완책도 마련했다. 바로 ‘고급 드라이 와인 등급’이다. 앞서 언급했듯 독일와인법에서는 등급 기준을 당도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독일의 드라이 와인은 품질이 좋은 데도 불구하고 스위트 와인이 아닌 탓에 최고 등급을 받을 수 없었다.
최근 통계를 보면, 독일에서 생산되는 와인 가운데 약 35%는 레드와인과 로제와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화이트와인이 90%였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레드와인과 로제와인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특히 슈페트부르군더로 만든 레드와인의 품질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드라이 와인의 비율 역시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실상은 이러한데도 많은 사람이 독일 와인은 달다고만 생각한다. 고백하자면 필자 역시 편견이 있었다. 독일 와인은 죄다 달뿐더러 화이트와인 일색이라고 말이다. 이런 편견이 왜 생겼을까.
독일에는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진 와인이 있다. 한때는 독일 수출 와인의 3분의 1을 차지하기도 한 ‘블루넌(Blue nun)’이다. 블루넌은 독일 라인헤센 지역에서 탄생한 달콤한 화이트 와인이다.
이 와인의 이름은 원래 립프라우밀히(Liebfraumilch)였다. ‘성모의 모유(Milk of Our Lady)’라는 뜻으로 리슬링, 질바너, 뮐러 트루가우 등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든다. 향긋하고 상큼하며 달콤한 데다 가격이 저렴해 인기가 많았다. 외국인이 발음하기 쉽도록 ‘블루넌’으로 이름을 바꿔 영국에 수출하면서부터 소위 대박을 터트렸다. 독일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와인이 된 것이다. 최근에는 ‘Blue Nun’ 상표를 단 카베르네소비뇽, 돈펠더, 메를로, 리슬링, 아이스 와인, 스파클링 와인까지 생산될 만큼 인기 있다.
■독일 와인은 다 달다고?
그런데 블루넌은 독일 와인 산업에 역효과도 가져왔다. 블루넌이 신드롬을 일으키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독일 와인은 값싸고 달콤한 화이트와인 일색이라는 편견이 생긴 것이다. 마치 보졸레 지역에 수준급 와인이 여럿 생산되지만, 보졸레 누보의 인기 탓에 보졸레 와인은 맛이 가볍고 저렴하다고 인식되듯 말이다.
독일에도 수준급 와인은 많다. 19세기 말 세계 최대의 와인 수입국이었던 영국의 자료를 보면, 와인으로 콧대가 높은 프랑스 와인을 젖히고 독일 와인이 최고가로 거래됐다. 부르고뉴 그랑크뤼 와인인 로마네(콩티)와 샹베르탱은 130파운드, 클로 드 부조는 150파운드인데 독일 와인은 200파운드였다. 당시엔 자연에서 단맛을 얻기 어려웠다. 단맛은 고귀한 맛으로 여겨져 독일의 잘 익은 포도로 만든 당도 높은 와인은 비쌀 수밖에.
독일의 고급 스위트 와인은 대부분 리슬링 품종으로 만든다. 리슬링은 독일처럼 포도 재배의 북방한계선인 북위 50도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날씨가 서늘한 탓에 포도가 서서히 익으면서 향미가 응축돼 높은 산도와 당도가 조화를 이룬다. 그러니 이런 포도로 만든 와인을 누군들 좋아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위트 와인은 에곤 뮐러가 리슬링 품종으로 빚은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BA, Trockenbeerenauslese)다.
아무튼, 독일에는 블루넌 말고도 수준급 와인이 많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더 나아가 스위트 와인뿐만 아니라 드라이 와인도 많다는 점도 말이다. 달콤한 와인은 메인 요리보다는 주로 디저트용으로 소비되는 데다가, 소비자들이 갈수록 달지 않은 와인을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독일에서 2000년 빈티지부터 드라이 와인을 나타내는 용어를 추가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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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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