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박자박 소웁탐방 - 익산 춘포면 춘포역과 대장공장, 만경강과 호남평야
전북 익산천 하류에 봉개산이 있다. 해발 46m, 익산시 춘포면에서 가장 높다. 다른 지역이라면 산 축에도 끼지 못할 낮은 봉우리가 당당히 이름을 보유할 수 있었던 건 드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계는 웬만한 고봉을 능가해 춘포면뿐만 아니라 완주 삼례, 김제 만경, 군산 대야와 옥구까지 거칠 것 없는 들판이 펼쳐진다. 춘포(春浦)는‘봄개’를 한자화한 지명이고, 봉개산 역시 ‘봄개산’에서 변형된 이름이니 춘포면의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개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강이나 내를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곧 만경강이다. 강 주변의 넉넉하고 비옥한 토지는 일찌감치 일본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됐고, 그 수탈의 흔적들이 이제 빛 바랜 감성으로 마을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선로와 멀어진 춘포역과 대장촌
춘포면 소재지 마을 북측에 춘포역이 있다. 바로 뒤로 전라선이 지나지만 열차는 교각 위로 무심히 내달릴 뿐이다. 옛 승강장과 선로도 흔적 없이 정리돼 춘포역은 선로와 완전히 단절된 채 건물만 덜렁 남았다. 역 광장에 화차 모형을 설치하고 대합실에 춘포역의 추억을 전시하고 있지만, 열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의 허전함을 완전히 채우지는 못한다. 철길을 잃어버린 역, 춘포역사가 그나마 보존될 수 있었던 건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덕분이다.
1914년 이리(현 익산)와 전주를 연결하는 전라선 보통역으로 시작한 춘포역은 국내에 남아 있는 간이역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허허벌판에 역이 들어선 건 일제의 수탈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좋게 표현하면 경지 정리와 대규모 농장 개간이다.
애초 춘포역의 명칭은 대장역이었다. 일제강점기 춘포면 일대에는 일본인 농장과 이주민 촌락이 들어서며 마을이 형성됐다. 구마모토에서 200여 명이 농장 관리인이나 노동자로 이주해 전체 주민의 10%가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일본인은 새로 개설한 마을을 ‘대장촌(大場村)’이라고 불렀고 ‘대장역’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너른 들판이라는 의미다. 지금도 중촌(中村)이라는 일본식 지명이 남아 있고, 1902년에 문을 연 대장교회도 옛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대체로 일직선 골목이 교차하는 마을에는 2층 겹 지붕 형태의 일본식 가옥이 여럿 남아 있다. 그중에서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은 춘포역과 함께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1940년대에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건축물 대장에는 1922년 건립한 것으로 나온다.
이 집은 호소카와(細川)농장의 농업 기술자였던 에토가 살았다고 한다. 1904년 춘포면에 자리 잡은 호소카와농장은 후작이라는 정치력을 등에 업고 일대에 철도, 도로, 학교, 신사, 수리조합 등을 유치했다. 국가 소유의 미개간지였던 만경강 일대를 간척하고 땅을 불하받는 방법으로 농지를 점유해 나갔다.
이 농장 소유의 땅만 99만2,000㎡(약 30만 평)가 넘는다. 이 정도 크기의 농장은 당시 일본에도 9개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전라북도에만 이런 농장이 또 9개였다고 하니 만경강 유역 드넓은 들판은 일본인 지주들에게 노다지나 마찬가지였다. 익산 시내에 있는 익옥수리조합사무실(현 익산왕도미래유산센터) 역시 일제강점기의 수탈정책을 보여주는 상징적 건물이다.
‘호소카와’라는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다. 1993년 8월부터 약 8개월간 제79대 일본 총리를 지낸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바로 춘포면 대농장주의 손자다. 호소카와 가문은 대대로 구마모토현의 영주였다. 이렇게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호소카와는 춘포면에 거주하지는 않았고 관리인이 업무를 대신했다.
마을 한가운데에 호소카와농장이 소유했던 도정공장이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외관은 곧 허물어질 듯 낡았지만 내부는 의외로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하늘타리(박과 식물) 노란 열매와 덩굴이 어지럽게 걸려 있는 대문 왼편에 글자 윤곽만 겨우 알아볼 정도로 낡은 간판이 걸려 있다. ‘대장공장’이라 쓰여 있다. 사무소에 걸린 공장 이력서에는 영업 시점이 1914년이라 적혀 있지만 익산군지에는 1905년 지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어쨌거나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
1998년까지 실제 정미소로 이용했던 공장을 지금은 서문근씨가 인수해 관리하고 있다. 정미소로서의 역할은 다했지만 ‘대장공장’ 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서문(西門·姓)씨는 청소에만 꼬박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요즘 유행하는 복고풍 카페나 공연장으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옛 감성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공장 외벽에 ‘멸공’ ‘방첩’ 등 유신시대의 반공 구호들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데, 이것만은 본래 모습이 아니라 영화 ‘강남 1970’을 촬영한 흔적이다.
서문씨는 텅 빈 공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온종일 심심하지 않다고 한다. 듬성듬성 구멍이 난 낡은 지붕과 환기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캄캄한 실내에 떨어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별이 되기도 하고, 물방울처럼 일렁거리기도 한다.
기계를 설치했던 콘크리트 기초는 자체로 설치작품이 되고, 공간과 공간을 넘나들 때마다 ‘오즈의 마법사’처럼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차고 단단한 철판도 나이를 먹으면 물러지는 걸까. 녹물이 흘러내리고 페인트 농도가 흐려진 양철 외벽마저 따스함을 품고 있다.
■만경강, 넉넉한 들판 적시는 물줄기
만경강을 빼고 춘포면 너른 들판을 이야기할 수 없다. 전북 완주에서 시작해 익산 김제 군산 등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거쳐 황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길이는 약 80㎞에 불과하지만 만경강에 농업용수를 의지하는 들판은 어느 곳보다 넓다.
춘포도 만경강과 접해 있다. 강둑에 오르면, 평평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던 마을의 윤곽이 조금은 파악된다. 그래도 지평선만큼 나지막한 마을이라 제방에 실제 장소와 겹쳐서 볼 수 있게 투명 유리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제방 위에는 폭이 좁은 차도와 자전거 도로가 나란히 이어진다. 지나다니는 차들이 거의 없어 호젓하게 산책하기 그만이다. 집집마다 텃밭 겸 정원을 가꾸고 있는 마을 풍경이 살갑고도 정겹다.
곳곳에 공원과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 둔치에는 아직도 억새가 한창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얀 억새 물결이 일렁거리고, 해가 질 무렵이면 보드라운 솜털로 노을이 스며들어 수많은 촛불이 한꺼번에 춤을 추는 듯하다.
옛 사람들은 이 풍경을 ‘노화십리(蘆花十里)’라고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갈대꽃이 십 리에 걸쳐 있다는 말이다. 솜뭉치처럼 부들부들한 갈대꽃이 어찌나 많았는지, 그 흔적이 ‘솜리’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다. 솜리문화예술회관을 비롯해 익산 시내에는 솜리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식당과 주점, 수선집, 유치원, 주유소까지 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솜털의 정체가 갈대꽃인지 억새꽃인지 불분명하게 됐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시절엔 순천만처럼 분명 갈대밭이 대세였을 텐데, 해수 유통이 끊긴 지금의 강변에는 억새가 주를 이루고 있다.
만경강은 일제강점기에 대규모 농장을 개간하면서 직선화하는 큰 변화를 겪었고, 근래에는 새만금방조제가 생기면서 사실상 바다와 단절된 강이 되고 말았다.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던 시절 춘포면 만경강변은 일대에서 알아주는 모래찜질 명소였다. 건강에 좋다는 소문에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인파가 몰려든 덕분에 돈을 받고 모래밭에 구덩이를 파주는 아르바이트까지 있었고, 동네 초등학생들도 3~5원씩 받고 물장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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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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