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똥. ‘몸은 좀 어때?’ H 선배가 SFO 에서 사돈이 될 집을 방문하기 위해 덴버 행 유나이티드 항공에 탑승하기 직전 보낸 문자다. 엊저녁의 내 모습을 보고 염려하는 선배의 문자를 읽고 있자니 만추의 아침 햇살을 받은 내 가슴의 냉골 구들장엔 따스한 온기가 퍼져 나간다.
‘77년 UC 데이비스에서 함께 유학생활을 하다 방금 문자를 보내준 H 선배는 생업을 위해, 그리고 남은 한집은 박사학위까지 마친 뒤 산호세로 내려와 다시 만나 올망졸망 아들딸들을 한데 어울려 키우던 이민 1세대 이웃 사촌들 이었다고 한다. 그 집이 대형 와인 가게를 인수해 20여년전 콜로라도로 이주한 뒤로 강산이 두번 변할 동안 연락이 끊어 졌었다가 산호세에 볼일이 있어 오랜만에 내려온 예비사돈이 선배가 운영하던 스테이크 레스토랑으로 어느 날 낯 익은 얼굴로 떠억하니 들어 서시더란다. 이십여년 만의, 그분의 작심한 그 발길이 두 집을 이웃사촌에서 사돈집안으로 엮어주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초·중등학교를 같이 다니며 몇 살 위의 동네 오빠였던 준수한 사윗감은 아버지를 도와 사업수완을 발휘하며 건실하게 와인 비지니스를 하고 있지만 마흔이 다 되도록 혼처를 못구하고 노총각으로 나이 들어 가는 것을 가슴 졸여 지켜만 보던 예비 사돈 부부는 문득 선배네 집의 이뻤던 두딸의 안부가 궁금해지셨다는 거다.
여우(?) 같은 작은 딸은 일찌감치 제 짝을 찾아 이 비싼 실리콘 밸리에 부모의 도움으로 멋진 단독주택도 구입해 알콩달콩 신혼의 단꿈에 빠져 사는데 반해, 수년째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서른 후반이 되도록 혼자사는 큰 딸을 생각할 때 마다 사춘기 딸을 임오군란 한국군 방식으로 하도 억누르며 키워 의기소침 자란 데 대한 죄책감과 안쓰러운 마음이 교차할 때 마다 선배는 한숨만 푹푹 쉬며 반성하며 가슴을 치면서 살아 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9회말 역전과 같은 결혼 드라마를 쓰게 됐다며 얼마나 좋아하던지 듣던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렇게 아름답다는데 나도 언젠가는 콜로라도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1년 임기의 TDY(Temporary Duty)로 오산 미공군 기지내 전술 정보단으로 파견됐다 같은 기지내의 한국 공군 작전사령부 신참 정보장교(소위)로 배속된 나와 절친이 됐던 브루스 대위가 귀국해 근무한다던, 미공군 교육 사령부가 있는 덴버의 라우리 공군기지(Lowry AFB), 그리고 공군 사관학교가 있는 콜로라도 스프링스도 가보고 싶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한세대 전 ‘애니즈 송’ 등 불후의 칸트리 포크송을 수십곡 부른 싱어도 자신의 이름을 ‘존 덴버’라고 지었겠는가. 페이스북을 아무리 뒤져도 브루스 대위의 종적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데, 나도 선배의 예비사돈 분 처럼 직접 기지로 찾아가면 그의 소식을 듣기는 아마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곳 샌프란 베이지역 대학 동창회의 원로로 나의 왕팬이신 선배님에게 이야기 했다가 ‘그렇게 몰랐냐’며 밉지 않은 타박도 받았지만(쩝..), 내가 제대 후 직장 초년병으로 박박기며 머리 속엔 어떡하면 인정받아 미국지점에 발령받아보나 하는 생각에 실무교본을 들구파던 ‘87년 여름, 팀 스피릿 한미 합동 군사 훈련 참가를 위해 보름간 한국을 다시 찾아온 브루스 대위를 서울에서 만났을 때였다. 교회라고는 12살 초딩 5학년때 삶은 계란을 나눠 준다는 말에 솔깃해 큰 북을 치며 교회당을 가득 매운 사람들이 ‘천사의 음성 들린다~’ 찬송가를 우렁차게 합창하던 돈암동 전도관에 친구 따라 딱 한번 갔던 것이 전부로 교회에 대해서는 일자 무식했던 내게 그가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구경시켜 달라고 하니 어디를 말하는지 도통 알 도리가 없었다. 두달 전 타계하신 (고) 조용기 목사님이 창립한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몰랐다니 도대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신문에서 그런 보도를 잘 안해준 탓이라고 핑계를 대며 모면하고 싶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좀 있으니 이번에는 어제 칠순을 맞아 자택에서 몇명만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축하 디너를 함께 했던 L 선배도 전화를 주셨다. ‘아니 멧돼지 같은 등치의 김회장(동창회)이’ 그렇게 몸이 아파 하던 걸 보니 걱정이 많이 됐다는 것이다. 이대 목동 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하던 바쁜 중에도 세계 유수의 미국 메인 프레임 컴퓨터 회사의 한국 지사장으로 펄펄 날던 선배님을 잘 내조해 오던 형수님을 유방암으로 잃고 짝 잃은 외기러기로 쓸쓸히 사신지 어느새 10년, 아들은 한국에서, 딸은 뉴저지에 근무하느라 꽃다발만 보낼 수 밖에 없어 가족은 아무도 없이 칠순을 맞은 것이다. 축하 분위기로 흥겨워야 할 식탁에서 나는 식은 땀이 줄줄나고 몸에서 열이 펄펄 나 견딜 수가 없었다.
큰 딜의 추진이 막바지 타결단계에 이르러 며칠간 극도로 신경을 집중한 탓도 있었고…선배의 칠순을 축하하느라 거푸 원샷을 때리느라 정신이 혼미해진 데다 몸에 걸친 90% 폴리에스터 혼방 와이셔츠는 주름이 잘 안가 좋은 반면 통풍이 안돼 몸에서 얼마나 열이 나던지… 정말 이러다 죽나 싶은 위기감에 웃통을 다 벗고 집 밖에서 찬바람을 한참 쐬어야 했다. 간신히 귀가해 몸 안의 내용물을 모두 비워내고 더운물 샤워 후 푸욱 자고 일어 났더니 선배들의 염려 덕분인지 거짓말 처럼 회복이 된 나는 이렇게 톡톡…..자판을 누르고 있다. 그 중의 제일은 단연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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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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