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위원회가 반도체 관련 긴급 보고서를 발표했다. “단기적으로는 미국 반도체 산업의 생산능력이 뒤처지는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 기술 패권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때는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분쟁이 한창이던 민감한 시기여서 보고서의 파장은 컸다.
1980년대 초 일본이 D램 시장을 석권하자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를 중심으로 한 기업계에서 일본산 반도체에 대한 수입 규제 조치를 정부에 잇달아 요청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공세를 기술 패권 도전이라는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미국은 일본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기 위해 1986년 일본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개시된 미국의 통상 공세는 1990년대 초반 일본 내 미국 반도체의 시장점유율이 20%에 이를 때까지 계속됐다.
미국의 전방위 공격에 시달린 일본은 핵심 소재와 제조 장비 분야로 특화하면서 반도체 산업에서의 주도권을 잃어갔다. 그 사이 한국과 대만 등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새로운 플레이어로 부상해 세계 반도체 산업의 지형이 바뀌었다.
그로부터 34년 후인 2021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미국이 반도체를 국가안보 사안으로 다루며 다시 움직이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당시 밥 스완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홈페이지를 통해 바이든 당선인에게 공개서한을 띄웠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능력의 80%를 아시아가 차지하는데 미국은 12%에 불과하고, 외국 정부의 보조금이 미국 반도체 산업에 큰 불이익이 되고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스완 CEO는 그러면서 미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부의 투자와 지원을 요청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바이든은 올해 6월 반도체 등 4대 품목의 공급망 점검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 내에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해 반도체 주도권을 되찾아오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어 반도체 설비 투자액의 40%를 세금 면제해주는 지원책이 담긴 반도체 산업 육성책 등을 쏟아내고 있다. 인텔 등 자국 기업은 물론 삼성전자 등 해외 업체들까지 백악관으로 호출해 ‘반도체 공급망 회의’를 갖고 있다. 23일에 또다시 글로벌 제조사들을 소집했다. 벌써 세 번째다.
미국의 움직임에 유럽연합(EU)은 역내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책을 담은 ‘유럽 반도체법’을 제정할 예정이다. 연구개발(R&D)과 공급 체계 등 최첨단의 반도체 자립 생태계 구축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반도체는 단순 경쟁을 넘어 기술 주권 문제”라며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2015년 ‘반도체 굴기’ 목표를 드러낸 중국은 자급률을 높이는 반도체 국산화 정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달 초 중국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인 SMIC는 10조 원 이상을 투입해 상하이에 반도체 공장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중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은 1980년대 일본 수준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중국제조 2025’를 통해 나타난 중국의 발전 계획은 미국이 국가안보 위협으로 느낄 정도로 위협적이다. 시장조사 업체 IC인사이츠는 중국의 올해 웨이퍼 생산능력이 일본을 제치고 대만·한국에 이어 3위로 올라설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도 자국 반도체 산업 진흥 정책을 추진하며 ‘반도체 재팬’ 부활을 꾀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20년째 세계 1위를 지켜온 우리나라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 전개다. 삼성전자조차 초격차 기술을 장담하기 힘든 위기 국면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이 만들겠다고 했던 ‘국가핵심전략산업특별법’이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논의 중인 법안에는 화학물질 등록 기준 완화와 수도권 대학 정원 조정 등 기업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내용이 대부분 빠졌다. 이러다가 80년대까지 세계 반도체 업계를 호령하다가 변방으로 밀려난 일본의 전철을 밟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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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훈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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