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재의 식사 -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 케이크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과 찰스 왕세자가 1981년 7월 29일 결혼식을 올린 뒤 런던 버킹엄궁의 발코니에 나란히 서 있다. [로이터]
영국 다이애나빈 탄생 60주년인 지난달 1일(현지시간) 런던 켄싱턴궁 성큰 가든에서 두 아들인 윌리엄(왼쪽) 왕세손과 해리 왕자가 고 다이애나빈 동상 제막식을 하고 있다. [로이터]
영국의 장미여 안녕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기를
당신은 찢겨진 삶을 어루만진 은혜
당신은 영국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속삭였지요
이제 천국으로 떠난 당신의 이름을
별들이 아로새기고 있네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비 내리는 일몰에도 스러지지 않고
당신만의 삶을 살았던 사람
이제 당신의 발자취가
영국의 푸른 언덕에 언제나 남아 있으리
당신의 촛불은 진작 타버리고 없지만
전설만은 영원히 남을 거예요
엘튼 존 ‘바람 앞의 촛불’
(Candle in the Wind, 1997)
불과 열흘 전인 12일, 찰스 영국 왕세자와 고 다이애나빈의 결혼식에 등장했던 케이크 한 조각이 경매로 팔렸다. 가격은 1,850파운드로 약 300만 원이었다. 맞다, 여러분이 지금 잘못 듣고 있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의 아들인 윌리엄과 해리 왕자도 아니고 1981년, 즉 40년 전에 벌어졌던 ‘세기의 결혼식’의 케이크이다. 영국 BBC에 의하면 경매의 시작가는 300파운드(약 48만 원)이었으며, 전화 및 온라인 입찰을 거친 끝에 위에서 언급한 가격으로 낙찰됐다. 언론이 예상했던 경매가 300~500파운드(48만~80만 원)를 훌쩍 뛰어넘는 가격이다.
아니, 먹지도 못하는 케이크 조각을 대체 누가 왜 산다는 말인가?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추억을 넘어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될 결혼식이기에 수요가 있는 모양이다. 케이크의 주인이 바뀐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케이크의 주인은 당시 결혼식에 초대받았던 모이라 스미스 여사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대비 가문의 일원인 스미스 여사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케이크를 먹지 않고 보관했다가 2008년 한 수집가에게 팔았다. 그리고 이 수집가가 다시 경매에 내놓으면서 이렇게 뉴스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냉장·냉동 기술 덕분에 케이크는 세월 속에서도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만든지 40년이나 된 케이크를 먹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경매 업체에서도 ‘먹지 말라’는 주의 문구를 꼬리표처럼 딸려 내보냈으며, 낙찰자인 영국 리즈의 게리 래이튼 또한 “평소 왕실의 복식이나 디자인 등에 관심이 많아서 입찰했지 먹으려고 산 것은 결코 아니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세기의 결혼식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식’이었으니, 당시 여섯 살이었던 나도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다. 무엇인가 아름다운 한 쌍의 부부가 탄생하는 느낌이었달까. 물론 그만큼의 역사적인 무게며 상징성을 지니는 결혼식이 없었을 리는 없다. 찰스의 어머니인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결혼식도 ‘세기’라는 단어로 수식된다. 그는 13세 때, 아버지 조지 6세와 함께 다트머스 해군대학을 방문했다가 18세의 그리스 왕족 필립공을 처음 만났다. 1947년 11월 20일 거행된 결혼식은 라디오로 중개됐으며 2,000만 명이 청취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편 공화국에서는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부비에의 예식(1953년 9월 12일)을 세기의 결혼식으로 꼽는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 과정은 디즈니의 만화 줄거리래도 무리가 없을 만큼의 화제성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야기에 의하면 찰스 왕세자는 젊은 시절 여성 편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숙부인 마운트배튼 경의 악명 높은 충고(“정착하기 전 씨를 뿌리고 최대한 많이 연애를 해보라”)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왕가에서 결혼을 승낙할 것 같지 않은 여성이나 심지어 기혼자까지 만나고 다녔었다. 그랬던 그도 서른이 되자 압박을 직면해야만 했다. 왕세자로서 왕실의 기준에 맞는 귀족 여성을 찾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왕가와 왕세자에게 다이애나는 훌륭한 선택지였다. 다정한 성격의 유치원 선생님으로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지녔으며 가문도 괜찮았고, 왕가의 시각에서 결격 사유라 할 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은 다이애나의 언니인 새라가 왕세자와 데이트를 했던 1977년부터 안면이 있었는데, 1980년에 이르러서야 왕세자가 다이애나를 진지한 결혼 상대로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왕가의 여름 별장인 밸모럴성에서 상견례를 치렀고 좋은 반응을 얻어내자 1981년 2월 3일, 6개월의 연애 끝에 왕세자가 다이애나에게 청혼했다. 다이애나의 주장에 의하면 두 사람은 결혼식 이전까지 딱 13번을 만났다고 한다.
1981년 2월 24일, 약 3주 동안 비밀이 지켜진 뒤 두 사람의 약혼이 공식 발표되었다. 결혼을 불과 이틀 남겨 두고 다이애나는 찰스 황태자가 카밀라 파커 보울스(현 왕세자빈)에게 선물했던 팔찌를 발견한다. 파커 보울스의 이름까지 새겨진 장신구였으므로 다이애나는 결혼 취소까지 고민했지만 언니의 만류로 생각을 접었다.
결국 파커 보울스는 2,500명이 참가하는 결혼식에는 초대받았지만 버킹엄궁에서 엄선된 인원만 참가하는 피로연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리하여 1981년 7월 29일,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됐다. 전 세계에서 7억5,000만 명이 TV 중계로 지켜 본, 그야말로 가장 많은 눈이 주목했던 결혼식이었다. 부피도 길이도 상당해 의전 마차에도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던 드레스를 입는 등 화제성에 맞고도 남을 만큼 성대한 결혼식이이었다. 한편 혼인 서약에서 ‘복종한다’는 문구를 다이애나가 입에 담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 결혼 피로연과 케이크
Quenelles de Barbue Cardinal / 바닷가재 소스의 크넬(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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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reme de Volaille Princess de Galles / 웨일즈 왕자의 치킨 슈프림(양고기 무스를 채운 닭가슴살)
Fves au Beurre / 흰강낭콩
Mas la crme / 옥수수크림
Pommes Nouvelles / 햇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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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ade / 샐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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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ises / 딸기
Crme Caille / 클로티드 크림
결혼식 직후 부부는 120명의 손님들과 함께 버킹엄궁에서 아침 식사로 피로연을 치렀다. 메뉴는 두 가지 전통을 따라 프랑스어로 쓰이는 한편, 신랑인 찰스 왕세자의 직위를 주요리의 이름에 붙였다. 다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전 피로연과 비교해볼 때 눈에 띄게 메뉴가 단순했는데, 당시 고작 스무 살이었던 어린 신부 다이애나를 감안한 구성이었다.
이번에 경매로 팔린 웨딩 케이크는 절대 외롭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위해 전부 27점의 케이크가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이번에 화제가 된 케이크만 하더라도 만약의 불상사에 대비해 모양과 크기가 똑같은 두 개를 만들었다. 이 공식 웨딩 케이크는 영국 왕립 해군이 제공했는데, 영국 해군 사관학교의 수석 제빵사인 채텀 켄트가 무려 14주에 걸쳐 만들었다. 찰스 왕세자의 문장과 스펜서 가문의 휘장으로 장식된 케이크는 아이싱(케이크를 덮어씌워 장식하는 맨 바깥쪽 켜) 속에 프루트케이크가 든, 높이 1.5m에 무게만 100㎏이 넘는 거대 조형물이었다. 한편 그 밖에도 ‘왕을 위한 케이크 장인’이라 알려진 벨기에의 페이스트리 셰프 SG샌더와 엘리자베스 왕대비의 80세 생일 및 해리 왕자의 세례 축하 케이크를 만든 바 있는 셰프 니콜라스 롯지가 각각 웨딩 케이크를 납품했다.
■신혼여행과 다이애나의 비참한 최후
결혼식 이후 두 사람은 3곳의 행선지를 거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일단 왕가의 열차를 타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부부가 첫날밤을 보냈던 장원 브로드랜즈(Broadlands)에서 사흘을 보내고 지브롤타 해협으로 날아가 왕가의 요트인 브리태니아로 11일 동안 항해했다. 그리고는 상견례를 치렀던 밸모럴성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던 왕가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정해진 일정에 따라 매체에 노출이 되었는데, 겉보기에는 행복해 보였지만 이미 균열의 조짐이 보였다. 찰스의 다이어리에서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사진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파커 보울스에게 선물받은 커프스 링크를 착용한다는 사실을 다이애나가 발견한 것이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 다이애나의 삶은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으며 두 사람은 1992년 별거에 들어간 뒤 1996년 공식 이혼했다. 다이애나가 BBC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세 사람이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으니 좀 붐비네요”라는 발언을 남긴 다음 해였다.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으로 인정받는 등 이혼 후 자기만의 삶을 살 본격적인 준비를 마쳤으나 1997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파리의 퐁드랄마 터널에서 벌어진 사고는 한때 파파라치의 무차별적인 추적을 피하려다 벌어진 것이라 알려졌지만, 프랑스 경찰의 발표 결과는 달랐다. 기사였던 앙리 폴이 술과 약물의 영향으로 제대로 운전할 수 없는 가운데 과속을 한 탓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다이아나의 나이는 고작 서른여섯 살이었으니, 엘튼 존은 1973년 발표한 적 있는 ‘바람 앞의 촛불’을 다시 각색 발표해 그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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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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