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친구 가정이 일년에 한 차례 여름휴가를 떠난다. 그 가정이 휴가를 갈 때마다 기르던 강아지를 우리 집에 맡기곤 했다.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는 나는 아들 친구 부탁이라 흔쾌히 들어주곤 난감해 한 적이 자주 있었다.
말티즈 종의 제리라는 이름을 가진 하얀 털이 북실한 예쁜 강아지이다. 처음엔 강아지를 어떻게 만지나 어떻게 놀아주나 털은 안 빠지나 하고 아주 힘들어했지만, 하얀 꼬리를 흔들며 졸졸졸 따라붙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이내 살아있는 인형같은 이 녀석을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두어 차례 그 강아지와 만남을 가졌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 가정이 휴가를 떠나며 제리를 맡기고 갔다. 그런데 제리가 작년에 비해 몸이 엄청 커진데다 토이를 던져주며 물어오라 해도 반응이 시원찮고, 아들 침대 위에 떡하니 올라가서 축 늘어져있기만 하고 우울증 걸린 것처럼 조용하게 바뀌어있었다.
그 제리를 보며 요즈음 갱년기로 몸에 변화가 오며 마음에 길을 잃은 듯 목적 없이 무기력ㄹ증에 빠져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강아지가 8살이라는데 사람 나이로는 곱하기 7을 해서 56세. 활발함도 떨어지고, 짖지도 않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그저 익숙한 사람만 따라다니고, 옆에 붙어있기만 하는 모습이 여간 측은하지 않았다.
사람은 할 일이 있고 뭔가가 하기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는 순간엔 우울도 오지 않으련만 애들이 다 자라 저마다 할 일로 바빠지고 엄마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순간이 오니 마치 길을 걷다 길을 잃은 듯 멍한 시간들이 많다.
그래서 제리를 데리고 배변하러 하루에 너댓 번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발이 더러우면 물 티슈로 닦아주고, 비누칠해 물로도 씻겨주고, “싯”하면 앉고, “핸드”하면 발을 내미는 제리에게 과자도 주며 나름 바쁜 시간들을 보내다보니, 몸은 다소 고되지만 어떤 대상을 돌보며 분주해진 내 시간에 새삼 활력이 생겨 좋은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어느새 아들 친구 가정이 여행에서 돌아와 제리와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제리가 더 나이 먹고, 몸이 커지고 더 둔해지면 어떡하지, 염려하며 나 자신과 동병상련을 하게 되었다.
‘대화의 희열’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어느 소설가가 로마 관광청에 오신 분께 로마를 어떻게 하면 잘 여행할 수 있냐고 질문했단다. 그리곤 기대와 간절함으로 굉장한 정보를 기대했을 그에게 답변이란 “길을 잃어버려라”였다고. 길을 잃어버리면 길을 찾기 위해 길 가는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 헤매기도 하고, 그러다 우연하게 해프닝도 발생하고 그것이 진정한 여행의 묘미라면서.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지금 낯선 여행지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길을 잃어버려야 진정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말에 ‘그래, 좀 오랜 시간 길을 잃었지만 여기가 끝은 아니야. 다시 일어서서 길을 묻고 길을 찾고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 가면 되는 거야. 잠시 길을 잃었다고, 시간 낭비했다고 포기하지 말고, 지금 이 막막했던 시간들을 딛고, 또다시 일어나는 거야’하며 긍정적인 위안을 얻게 되었다.
꼬물꼬물 품안의 자녀들이 어느새 자라 이제 대학에 갈 나이가 됐고, 기숙사에 들어간다며 떠날 채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이제 잠시 길을 잃은 듯 당황스럽지만 또 다른 예비되고 준비된 나의 길을 향해 걸어야함을 느껴본다. 나의 손길이 필요했던 곳에 아낌없이 나를 주었던 시간들에 후회함 없이 참 바쁘게 보람되게 살아왔다. 이제 또 다른 여행길에선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추석빔, 설빔 머리맡에 놓고 잠들었던 어린 시절 그때처럼 기대되고 설렌다.
집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앞마당에 이런 팻말을 꽂아놓은 집이 있다. “Don’t give up” “you are not alone” 그래,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길이 있다. 작년과 많이 바뀌어 지금 방향을 잃은 듯 내 모습 같은 제리야, 내년엔 더 나이를 먹겠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생기있고, 역동적인 너의 모습 나의 모습을 마주해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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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영 노스캐롤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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