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기다리던 봄이다. 마당에 나가 꽃대 올린 수선화를 마중한다. 언 땅이 녹은 것은 확실했으나 움추러든 가슴을 펴기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 꽃이 피기 시작했으나 꽃 나무를 심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겨우내 비어있던 화분에 흙을 채워 두기로 한다.
창 밖의 나무들은 오늘도 봄으로 건너가기 위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펼쳐 읽다가 문득 생각난 책 한권을 찾으로 서재로 내려갔다. 책장 마다 빼곡히 들어 앉은 책과 미처 자리잡지 못한 책들이 서재 바닥에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집을 이사하면서 제대로 정리를 못하고 겨우 박스만 풀어 놓은 상태로 버텨온 것이 벌써 4년이 지났음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그동안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에는 상당한 시간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 하다고 말하며 내 게으름을 합리화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에야 미루어 둔 숙제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나는 서가 정리를 하다말고 어느새 책 갈피 사이에 끼워 두고 잊었던 메모나 사진들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누렇게 변색된 책의 묵은 냄새나 오래된 활자조차 오랜 친구들 만난듯 반가웠고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보고 그 때의 유치했던 감정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런데 우연히 펼쳐 든 책에서 오래된 사진 한장이 발 밑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내가 이 사진을 간직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누이와 엄마 그리고 외할머니까지 3대의 여자들이 목련꽃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누이들이 엄마와 함께 외갓집에 갔었던 어느 봄날의 사진이었다. ‘아’ 하고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사진속 누이의 이름을 부르며 ‘ 봄이네’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을 알고 이내 내 감정을 다독거려야 했다. 혈육과 떨어져 서로 시공간을 비켜선 채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 나의 몫임을 받아 들여야 했으나 썰물이 지나간 것 처럼 마음 한켠이 무너져 내렸다.
장독대 뒤에 숨은 막내 누이와 그 뒤를 따르는 허리 굽은 외할머니와 술래가 되어 목련 나무에 이마를 대고 노래를 부르던 큰 누이의 얼굴이 보인다. 젊은 엄마가 그 곁에서 나물을 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때는 3대 여자들이 숙명처럼 맞이한 어느 ‘봄 날’ 이었으나 이제는 내 기억속에 그리운 풍경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나무 아래 핀 이름 모를 작은 꽃들에게도 따뜻한 봄볕이 그대로 묻어있었을 것이다. 작은 꽃나무의 키 높이에 맞추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보던 외할머니와 누이 손톱에 꽃물을 들여주던 젊은 엄마와 곱게 물든 손톱을 보며 마냥 좋아하던 누이의 얼굴이 어제의 일처럼 선연하다. 그리고 그 빛바랜 풍경 너머로 봄은 무수히 왔고 다시 졌다.
지나가는 슬픔이 머무는 슬픔을 토닥거리고, 지나가는 사랑이 머무는 사랑을 보고 미소 짓는다. 언젠가 그들이 무심히 지나쳐 갔던 골목길에서 그들의 흔적을 느꼈고, 그 흔적을 붙잡으며 나는 노을 앞에서, 때로는 무심한 바다 앞에서도 머무를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물론 웃음소리 마저 깊이 각인 되어 있는 듯한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며 내가 온 길이 돌아 갈 수 없는 강 이쪽에 있음을 깨닫는다. 비록 강 이쪽에 있으나 그들의 웃음 소리가 어느 종소리 보다도 맑았다고 기억하고 살겠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발길이 끊어진 산 중턱의 폐가에도 비는 내렸다. 버려진 폐가에 온전히 남겨져 있는 것이 있을까마는 굵은 빗줄기는 마지막 것까지 알뜰히 씻어 가려는것 같았다. 비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새순을 피워 내는 숲의 예식이 숭고해 보이기 까지 했다. 어쩌면 소멸과 소생은 처음부터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봄비가 절망의 눈물도, 비극의 한숨도 씻어 가 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 위에 감사가 이 봄의 새싹처럼 싹이 틀 것이다.
따뜻함과 차가움이 교차하며 4월이 피고 4월이 진다. 순서를 정하지 않아도 때를 아는 자연의 신비를 목도하며 감탄한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숨길 수 없는 그리움에 때로 고통스럽지만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이라 여기기로 한다. 창밖으로는 바람이 불고 꽃이 피어난다. 오늘은 봄바람을 타고 순항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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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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