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에 여행 갔을 때다. 관광버스를 타고 섬 일주를 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봤다. 바닷가 풍경 속을 유영하듯 달리던 버스가 숲에 들어섰을 때였다. 버스 차창 너머 도로 양옆으로 반듯하게 자란 나무들이 우거졌다.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소실점이라도 그린 듯했다. 가이드는 나무를 가리키며 삼나무라고 했다. 흔히‘전봇대 나무’라고도 부른단다. 그에 따르면, 한때 일본에서는 전봇대나 가구 만드는 데 쓰려고 대마도에 삼나무 숲을 조성했다. 그런데 나무가 자라 쓸 만해졌을 때는 전봇대가 시멘트나 철제로 바뀌면서 삼나무 전봇대는 자취를 감췄다. 벨 일이 없게 된 삼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지금처럼 숲을 이뤘다. 두 팔로 눈을 가리고 나무 전봇대에 기대고는“하나, 둘, 셋... 열, 다 숨었니?” 시간의 나이테로 새겨진 내 어릴 적 기억 하나가 빼곡한 삼나무 사이에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는 듯했다. 가이드는 말을 이었다.“이곳의 삼나무만 팔아도...” 삼나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와인스쿨에서 배운 오크통에 얽힌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크통은 물론 오크나무로 만든다. 오크나무는 세계 여러 곳에서 자라지만, 자타공인 최고의 오크통 나무는 프랑스산이다. 브랜디의 대명사‘코냑’으로 유명한 코냑 지방 동쪽의 리무쟁이란 곳이 특히 유명하다.
루이 14세 때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향신료 무역을 장악했다. 네덜란드가 막대한 이익을 거두자 바다 건너 잉글랜드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느닷없이 항해법을 발포했다. 외국 상선이 출입하는 길목인 도버해협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러더니 기어이 네덜란드와 전쟁도 벌였다.
한편 네덜란드를 아니꼽게 보는 나라가 또 있었다. 프랑스였다. 자국의 상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 역시 조치를 취했다. 당시 재무장관이던 콜베르(Jean Bastique Colbert)는 외국 상선에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네덜란드나 잉글랜드만큼 프랑스 해군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생각을 곧바로 실행에 옮겨 프랑스 서부 로슈포르에 해군기지와 조선소를 세우고 임야 보존법을 선포해 리무쟁에 선박용으로 쓸 오크나무 숲을 조성했다. 참고로 리무쟁 외에도 트롱세, 알리에, 느베르, 보주가 프랑스산 오크나무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사이 기술 발전이 나무의 성장 속도를 앞지르고 말았다. 오크나무가 선박용 목재로 쓸 만큼 충분히 자랐을 때는 더 강한 쇠로 배를 만든 것이다. 오크나무 숲은 꽃가루를 날리며 피톤치드나 내뿜을 판이었다. 그러던 차에 오크나무의 진가를 알아차린 이들이 나타난다.
와인 생산자들은 와인 발효와 숙성에 오크통을 쓰면 다른 나무통을 쓸 때보다 더 좋은 풍미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들이 ‘콜베르의 그 오크나무’로 오크통을 만들었다. 이는 프랑스가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과 와인 증류주인 최고급 브랜디 코냑을 생산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오크통에는 프렌치오크라 불리는 프랑스산뿐만 아니라 미국산이나 동유럽산 오크나무도 사용된다. 그러나 프렌치오크나무가 단연 최고급이다. 수준급 와인을 생산하는 세계 유수의 와이너리들 대부분이 프렌치오크통을 선호한다.
루이14세 때 조성한 오크나무 숲 덕분에 오늘날에도 프랑스는 오크통 목재를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한다. 현재 보르도에서 사용하는 225리터짜리 바리크나 부르고뉴에서 사용하는 228리터짜리 피에스는 개당 700~800유로 정도에 거래된다.
프렌치오크통은 미국산이나 동유럽산보다 재질이 단단하고 조밀하다. 알코올과 만나면 오크나무의 세포에서 향이 서서히 우러나와 섬세하고 다양하며 깊은 풍미를 와인에 더해준다. 프렌치오크통이 다른 통들에 비해 더 비싼 이유이다. 새 오크통일수록 풍미가 더 진하게 우러나는데, 그래서인지 발효나 숙성 과정에서 새 프렌치오크통을 몇 퍼센트 비율로 사용했는지를 내세워 마케팅에 십분 활용하기도 한다.
오크통은 재질과 제작 방법 모두 배 만드는 기술에서 영향을 받았다. 나무로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판을 유연하게 구부려야 한다. 이때 뜨거운 열을 이용한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오크통의 곡선도 같은 기술을 이용해 열처리 과정을 거쳐 만든다. 구부린 오크통 안쪽 면을 불에 굽기도 한다. 이 과정은 무척 중요하다. 구운 나무에서 나오는 풍미가 와인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나무판을 굽는 과정을 말 그대로 ‘토스팅’이라고 한다. 토스팅을 어느 정도 했느냐에 따라 와인의 풍미(맛과 향)뿐만 아니라 색도 달라지는데, 약하게 하면 나무 자체의 풍미는 적은 대신 나무에 함유된 타닌이 다량 추출된다. 중간 정도로 구우면 바닐라나 캐러멜 풍미가 더해진다. 강하게 구우면 정향, 시나몬, 스모크, 스파이스, 커피의 풍미가 난다. 반면 강하게 구울수록 와인의 색은 연해진다.
요한 것이 방수이다. 나무판과 판 사이를 조여 물이 새지 않도록 단단하고 촘촘하게 고정해야 한다. 오크통 역시 마찬가지다. 판과 판 사이를 조이기 위해 오크통 둘레를 밤나무 테나 청동이나 철 테로 두른다. 이렇게 하면 오크통에서 와인이 새지 않을뿐더러 무척 견고해, 쉽게 갈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사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미 야자나무로 만든 나무통에 와인을 담아 운반했다는 설도 있지만, 와인 양조에 나무통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세기쯤부터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했을 당시, 갈리아 땅에는 켈트족 일파인 갈리아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맥주의 한 종류인 세르부아즈를 주로 마셨다. 그들이 세르부아즈를 담아 보관하고 운반하는 데 나무통을 만들어 사용했다, 또 곡물이나 여타 먹을 것을 담거나 옷이나 짐을 보관할 때도 나무통을 활용했고, 짐승이나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도구로도 사용했다. 갈리아족에게 영향을 받은 로마 일부 지역에서는 그때부터 와인 양조에 나무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무통 이전에는 암포라를 사용했다. 암포라는 흙으로 만들어 깨지기 쉬웠으며 무거워 운반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밑이 뾰족해 세워놓을 선반이 필요했다. 배에 실어 운반하자면 여간 수고스러운 게 아니었다. 모래를 두툼하게 깔아 암포라의 뾰족한 밑을 모래에 묻어 고정해 세우거나, 구멍 뚫린 나무판에 암포라를 꽂아 밧줄로 칭칭 동여매 고정했다.
이에 비하자면, 나무통은 그야말로 신기술의 집합체였다. 무게가 암포라의 4분의 1밖에 안 될 정도로 가벼운 데다 깨질 염려도 없었으니 말이다. 타원형이라 굴려서 운반할 수도 있고 차곡차곡 여러 층으로 쌓아 적재할 수도 있으니, 차지하는 공간도 적고 효율적이었다. 마개가 있어 통에 와인을 쉽게 부을 수 있었고, 하단에 구멍을 뚫어 와인을 비워내기도 쉬웠다.
이처럼 나무통은 1세기부터 사용돼 3세기에 이르면 로마제국의 서쪽, 즉 지금의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에까지 널리 퍼졌다. 큰 나무통은 와인을 양조할 때 사용됐고, 작은 나무통은 와인 보관과 운반에 사용됐다.
물론 나무통에도 흠이 하나 있다. 재질이 나무인지라 시간이 오래 지나면 섞어버리는 게 문제였다. 이 때문에 당시 와인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고고학적 난제가 생기고 말았다.
와인 수요가 늘어난 중세에는 와인 양조와 보관, 운반에 나무통만 사용했다. 18~19세기에 이르러 단단한 유리병이 널리 쓰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시에 사용한 와인용 나무통의 재질은 오크나무만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나무로 나무통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와인 양조학자들은 나무통을 사용한 중세의 와인은 암포라나 돌륨(거대 항아리) 같은 항아리에서 만든 고대의 와인보다 보존 기간이 짧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래도 항아리보다는 나무통에 담긴 와인이 산화되거나 부패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탓에 중세 와인이 고대 와인보다 질이 현저히 낮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다. 나무통은 항아리보다 산화에 취약하다. 게다가 와인의 산패나 부패 원인을 몰랐던 당시에 살균을 제대로 했을 리 없다.
이런 기록이 있다. 당시 보르도에서는 영국 수출용 와인을 10월에 출하했다고 한다. 출하하고 남은 와인은 12월이 지나면 통을 바꿔 다시 출하해야 했다. 이런 와인을 ‘레크’라고 한다. 레크는 만든 지 얼마 안 된 와인에 비해 값이 쌌다고 한다. 급이 떨어진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무통의 와인 보존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통을 바꿔서라도 가볍고 신선한 와인을 선호하는 영국인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한 것이다.
나무통 안쪽에 황을 태워 살균하는 법이 알려진 때는 18세기에 이르러서다. 네덜란드 와인 상인들이 라인지방에서 해오던 비법을 보르도에 전하면서부터다. 나무통 안쪽에 황심지를 태우면 특이한 성분이 나온다. 이는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지만, 와인의 안정성을 위해 양조단계에서 다양하게 사용하는 아황산염과 같은 성분이다.
긴 세월 동안 여러 재질의 나무통을 경험한 생산자들은 나무의 종류뿐만 아니라 통의 크기와 숙성 시간에 따라 와인 맛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무통 중에서도 오크통이 와인과 찰떡궁합이라는 점도.
오늘날에는 오크통 대신 스테인리스스틸 탱크나 시멘트 탱크를 더 많이 사용한다. 스테인리스스틸 탱크는 온도 조절과 위생 관리가 용이하고, 시멘트 탱크는 온도 변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예 오크 풍미 없이 포도 본연의 아로마를 살려 와인을 빚기도 하고, 양조 단계마다 오크(오크통이나 오크칩)를 적절히 사용해 생산자가 추구하는 스타일에 따라 와인을 만든다.
숲속의 저 빼곡한 나무가 다 같아 보여도 하나하나 다르듯 와인도 어떤 통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빚어졌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그날 숨바꼭질하면서 필자가 찾던 친구들은 어디 있을까. 머리카락 보일까봐 꼭꼭 숨어버린 것일까. 각자의 길로 흩어진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오래 두고 친한 게 친구’라는데, 어느 날 은은하게 오크향이 밴 와인 한 병 들고 친구들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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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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