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바람을 동반한 눈폭풍이 이른 새벽부터 몰아치기 시작했고 하루종일 그 기세는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고 문 앞을 막아 선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여 하루를 온전히 갇혀 지내게 될 것이었다. 나는 투덜댔으나 아내는 선물같은 하루라고 여기는 듯 싶었고,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료해 하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휴대폰에 담아 둔 사진을 정리하며 즐거워 했다. 문득 아내가 ‘지난해 오늘은 몰타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갔었네’ 라고 혼자말처럼 얘기했을 때,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무척 붐비던 로마 공항과 이슬비가 내리던 로마의 거리가 생각났다. 돌이켜 보면 고작 1년 전의 일인데도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아득했다. 코비드(Covid)라는 강이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 시공간을 가로질러 얼마나 넓고 깊게 흐르고 있었는지를 알겠다.
TV에서는 5년만의 폭설로 뉴욕을 비롯한 동북부 지역의 모든 도로가 마비되었다는 보도가 잇달았고, 휴대폰으로는 외출을 자제하고 정전을 대비하라는 재난 경보가 날아왔다. 5년 전 폭설이 내리던 날에는 무엇을 했었는지 떠올려보려 했으나 특별히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처럼 뉴스를 보며 집안에 갇혀 하루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대답 대신 사진 한장을 보여 주었는데 나와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사진속 상황들은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5년 전 오늘, 10여일의 휴가를 끝내고 우리 가족은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나 보딩 패스를 받고도 출발 시간이 몇 차례 지연되자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젊은 남자가 게이트 앞의 직원들에게 소심하게 항의를 했고, 기체 정비 중이라는 대답을 듣자 주변에 몰려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수긍하며 물러섰다. 그 후로도 몇차례 지연되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모두 지쳐갈 무렵 쯤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쿠폰을 나누어준다는 방송이 이어졌다. 조금 전까지 항의하던 이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고, 공항내의 전광판은 동부로 향하는 모든 항공편의 이륙이 취소되고 있다고 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휴가의 낭만에 취해 동북부를 강타한 눈폭풍의 실상을 잘 모르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차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듯 했다. 항공사 직원을 둘러싸고 출발 가능한 항공편을 찾는 사람들과 전화기를 붙잡고 급하게 숙소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소란스럽던 공항 풍경이 기억난다.
겨울 방학기간이 겹친 기간이라서 갑작스럽게 휴가지에서 숙소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고, 포기한 사람들은 항공사에서 나누어주는 모포를 받아 의자에서 잠을 청했다. 다행히 우리는 운 좋게 호텔 존(Zone)에서 제법 괜찮은 호텔에 빈 방 하나를 찾아 4식구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계획했던 일정이 어긋나면서 느꼈던 낭패감과 절망감은 어느새 깨끗이 잊혀졌고,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다운타운 구경에 나섰다. 해마다 칸쿤으로 가족 휴가를 왔지만 온전한 휴식을 위해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리조트를 선호한 까닭에 한 밤중에 도심까지 나와 시간을 보내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려한 불빛이 이어진 골목길은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졌고, 밤을 잊은 상가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녁을 먹고 긴장이 풀리니 하루의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깜빡 잠에 빠졌다가 깨어보니 아내와 두 아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항공편을 알아 보느라 분주했다. 뉴욕 인근의 모든 공항은 이미 폐쇄되었고 그나마 가까운 도시의 공항으로 도착하는 항공편은 빈 자리가 나오기 무섭게 예약하는 도중에 사라져 갔다. 2시간여 만에 마침내 필라델피아로 가는 티켓 예약에 성공했고 우리는 환호했다. 도착시간이 늦어 누군가가 포기한 순간과 우리의 예약 버튼이 교차하며 만든 희열의 순간이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바닷가를 걸으며 우리는 ‘휴가의 연장’을 만끽했다.
고행의 순간은 필라델리아 공항에 도착하며 이어졌고 ‘그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영하 20도라는 기장의 안내 방송을 기억하며 옷을 껴입었지만 낯선 도시의 한파와 폭설은 너그럽지 않았다. 뉴욕으로 가기 위해 렌트카를 알아보며 절망했고, 어렵게 예약에 성공해 차에 짐을 실으며 우리는 행복해 했다. 장기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뉴욕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내 걱정했고, 주차장에서 차를 찾아 낸 후 환호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주차장은 깨끗했고 누군가가 차 주변을 말끔하게 치워놓았던 것이다. 비록 유리창에 쌓인 눈은 자켓을 벗어 쓸어 내려야 했지만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기뻤다. 이제 2시간 후면 집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면 휴양지 에서 보낸 10여일의 휴가보다는 덤으로 얻은 1박 3일의 ‘휴가’가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SNS 에서 알려주는 ‘과거의 오늘’이라는 창을 열어보며 잊고 있던 ‘그 날’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나간 일이 특별해서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1년 후에 기억할 별 일 없는 ‘오늘’ 같은 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1년 후, 10년 후에 기억할 오늘은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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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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