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사회’는 근 100년 전에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소설이다. 한 때 한국문학 전집에는 그의 또 다른 단편들인 ‘빈처’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과 함께 빠지지 않고 실렸던 작품이다. 단편 읽기의 재미를 일깨워주던 소설들로 기억된다. 현진건은 사실주의적 단편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중 한 사람이라는 문학사적 평가와 함께, 동아일보 재직 당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른 기개있는 기자이기도 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시대가 나를 술 마시게 한다”는 것이다. 술꾼이 핑계가 없어서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일제 강점기 지식인이었던 주인공은 시대를 탓하며 술에 젖어 지낸다. 이 단편이 문득 떠오른 것은 코로나가 일본 식민지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팬데믹 이후 알코올 소비는 그 정도로 급증했다.
정당에 관계없이 정치인들은 술 소비를 부추긴다. 식당과 술집 영업을 규제하면서 부채의식이 있어서 그런 지 모르겠다. 술집에서는 술의 외부 반출이 허용되지 않지만 뉴욕의 민주당 주지사는 팬데믹 후 이를 허용하고 있다. 플로리다의 공화당 주지사는 더 나아가 식당이나 바의 주류 배달영업을 허가했다. 배달된 술은 고스란히 소비자들이 처리해야 한다.
이런 배려 덕이었을까. 지난달 선거 때는 그 전 4주간의 화요일 보다 술 배달이 68% 급증했다고 한다. 대선 승자인 민주당 강세주는 75%, 경합주는 55%, 공화당 주는 33% 술 주문이 늘었다는 전언이다. 그날은 선거여서 그렇다 치고, 온 라인 주류배달은 지난 3월 이후 각광받는 비즈니스가 됐다. 앱을 통해 로컬 리커 스토어에서 집까지 주문과 배달이 가능해 졌기 때문이다. 주류 전문 배달업체인 드리즐리(Drizly)의 최근 매출은 1년 전보다 350%가 늘었다고 한다. 팬데믹으로 뜻밖의 성장산업이 된 것이다.
닐슨 시장조사는 팬데믹 초기인 지난 3월, 스토어와 온라인 주류 세일이 이미 각각 50% 정도 급증한 것으로 파악한다.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가 없다. 젊은 밀레니얼 세대는 4명중 한 명, 그 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X세대는 5명중 한 명이 코비드-19 이후 음주량이 늘었다고 답했다. 흔히 백포도주인 샤도네부터 시작하는 여성 음주는 더 심각하다. 과도한 ‘엄마 주스’ 때문에 여성의 알코올 중독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는 것이 전문가 진단이다.
켄터기 주의 소도시 오웬스보로가 얼마 전 주목을 받은 것은 뜻밖의 이유 때문이었다. 인구 6만 명의 이 도시는 미 전국의 389개 메트로폴리탄 지역 중에서 팬데믹 이후 유일하게 실업율이 낮아진 곳이었다. 이곳에 버본 위스키 생산공장이 있다는 것이 원인의 하나로 분석됐다.
줌 미팅을 통해 교회 모임만 갖고, 학교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다. 줌으로 하는 온라인 칵테일 파티도 유행이다. 마티니에 빗대 쿼런티니(Quarantini), ‘격리 주’도 출시됐다. 한 잡지는 코비드-19격리 기간에 새로 개발됐다는 칵테일 22가지를 소개하기도 한다.
고립, 외로움, 따분함, 불안 등이 음주의 주된 이유로 꼽힌다. 술집은 문을 닫고, 만남은 크게 줄었는데도 음주 단속에 걸리는 사람은 줄지 않았다. 자작, 집에서 혼자 마시는 술이 늘었다는 뜻일 것이다. 경찰은 이번 연말에도 음주 운전 집중단속을 예고하고 있다.
알코올 중독에 대한 한인과 미국인의 인식은 크게 다르다. 음주운전에 걸렸다면 알코올 중독인가. 천만의 말씀, 운이 나빠 걸렸을 뿐이라고 한인들은 생각한다. 그 저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셨겠는가. 하필 나만 걸린 것은 불운했기 때문이지, 알코올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사회는 음주운전으로 적발될 정도면 치료가 필요한 중증 알코올 중독으로 본다. 한국과 미국은 음주문화가 판이하다. 만취가 때로 무용담이 되고,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은 심신 미약을 이유로 형의 감경 사유가 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미국서는 물론 어림없는 이야기다.
알코올리즘은 ‘황혼병’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채색되기도 하지만 심각한 중독현상이다. 국립 알코올 남용과 중독 연구소(NIAAA)는 팬데믹 알코올릭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백신이 사용단계에 들어선 코로나 사태는 내년 중반을 넘어서면 끝날 것으로 기대되지만 알코올 중독은 팬데믹이 끝난다고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마다 미국에서는 술로 인해 8만8,000명이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약물 남용으로 인한 사망자 보다 많은 숫자다.
현진건의 소설에서 학문이 모자라는 아내는 백날 술에 절어 들어오는 동경 유학생 출신 남편을 보며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하며 한탄한다. 소설 속의 남편은 흔히 시대상황을 고뇌하고 절망하는 지식인으로 묘사되지만, “입으로만 고민하고, 그 탓으로 술 마실 핑계만 찾는 패배적이요, 퇴폐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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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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