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덥다. 남가주에는 여름이 좀 늦게 온다. 이처럼 더운 계절이면 언론들도 보통은 ‘납량특집’을 마련한다. 시원하고 서늘하게 하는 기사들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천혜의 납량특집,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코로나바이러스19 때문이다.
얼마 전 이곳 실비치 은퇴마을 안에서 아침산보를 하다가 이웃 사는 동료목사를 만났다. 입마개를 벗으려다 서로 다시 썼다. 아직 ‘뉴 노멀’에 익숙하지 않았다. 인사 외에는 갑자기 할 말도 없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혹시 한국에서 군대생활 했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일일이팔일오삼육, 육군하사 이정근 신고합니다.” 큰 소리로 차렷자세 경례를 붙였다.
그도 맞경례를 하면서 군번과 관등성명을 말했다. 갑자기 은퇴마을이 군부대로 변했다. 원래 이곳이 군부대 막사들이었던 점도 있었다. 자연 군대생활 체험담으로 열을 올렸다. 속이 다 시원했다. 한 순간이나마 납량휴가를 그럴듯하게 보낸 셈이다. 모국에서 군대생활을 했던 남자들에게 군대 체험담만큼 가슴 후련한 대화가 어디 있던가. 군대체험 없는 분들에게는 미안스럽다.
대학졸업식을 앞두고 육군소집장이 나와서 논산 제2훈련소에 입소했다. 그때부터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취급을 받았다. 서울사대를 졸업했던 까닭에 교육이라면 경외스러운 언어로만 알았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이 자식 교육 좀 시켜.’ 그러면 그건 반쯤 죽여 놓으라는 뜻이었다. 특히 훈련생활이 끝나고 다시 훈련소 조교로 배치되었을 때에는 고참병들로부터 연속 잔인구타를 선물 받았다.
그 얼마 전 모교재학생 하나가 제2훈련소 화장실에서 자살했던 사건이 전국을 들쑤셔 놓았다. 그 연인이 보내온 편지와 사진을 고참병들이 꺼내서 심한 모욕을 했고, 그에 저항했다가 더욱 잔인한 구타세례를 받았다. 아니, 구타침례였다. 그런 여파로 ‘구타절대금지’란 표어로 훈련소 전체가 도배를 해놓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그건 상부에서 그냥 하는 말이고 한국군대에서는 적에게 맞아죽기 전에 고참병들에게 반쯤은 죽은 시체가 되어야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 년에 한 번 제2훈련소를 초도순시했다. 그 해에도 1월초에 다녀갔다. 그런데 마침 그 때 대통령 인척훈련생이 훈련장 사고로 한 손이 마비되었다. 박대통령은 그것을 보고받고, “강한 군인이 되도록 훈련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랬다. 대통령은 그렇게 고상하게 표현해도 그것이 현장에서는 ‘죽지 않을 만큼 마음껏 두들겨 패라.’는 허가증이 되었다.
고참병들이 나를 반쯤 죽도록 구타하고는 맨 끝에 하는 말이 있다. ‘이 쌔끼야, 해골바가지 하나 좋으면 다야.’ 서울대 학생 된 것을 그토록 후회한 적은 없었다. 탈영했다가 체포되어 차라리 군대형무소에 가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 같았다. 소속한 군부대 어느 쪽으로 탈영하면 경비대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정보까지 수집해놓았다. 훈련소 입사동기인 친구가 있었는데 탈영했다 붙잡혀서 군형무소에 갇혀있었다. “야, 형무소가 부대보다 더 편해.” 그런 말도 들었다.
어느 날도 고참병들에게 한 밤중에 끌려가 철봉대와 곡괭이자루로 얻어맞고 온갖 모욕을 당했다. 탈영할 생각을 결정적으로 굳혀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학생회장일 때에는 비리 저지른 교장선생님께 항의하는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가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 다음 해에는 4.19학생혁명에 참가해서 경무대 앞 총알받이에서도 살아남았다. 투쟁경력이 꽤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맥아더 장군 기도 한 구절이 내 머리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내 자녀가 적과 싸워 이기기 전에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맥아더 장군은 특별히 흠숭하는 영웅이다. 초등학생 때 뒷산에 올라 9월 보름날의 인천상륙작전을 밤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신앙장군의 간곡한 기도가 바로 자녀들을 위한 기도가 되고 있다.
게다가 훈련소장 표창을 받은 최우수사병이 되었고, 일 계급 특진과 1주간의 휴가선물을 받았다. 더 있다. 제대하고 35년이 지나 국방부 발행 ‘마음의 양식’에 게재되어 육해공군 모든 장사병들이 읽은 간증이 되었다. “주님, 이 글 읽는 사람마다 코비드19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전에 자기와의 싸움에서 통쾌하게 승리하도록 통 크으게 도우소서.” 그런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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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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