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그막에 세월의 속도가 자꾸 헷갈린다. 하루하루는 느린데 일주일, 한달은 전광석화 같다. 내가 속한 7080세대는 고국에서 8·15, 6·25, 4·19, 5·16, 10·26 등 격변기를 숨 가쁘게 살았다. 이민 온 뒤에도 눈꼴신 인종차별 속에 밤낮없이 일하며 삶의 터전을 일구느라 등골이 휘었다. 4·29 폭동으로 폭망한 친구도 있었다. 도대체 세월을 유유자적 즐겨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딴판이다. 세월이 정체됐다. 나 자신 ‘립 반 윙클’이 된 기분이다. 산속에서 낮잠을 한숨 자고 내려오니 20년이 흘렀더라는 어빙 워싱턴 소설의 주인공이다. ‘허송세월 삼식이’가 된 듯한 자괴심도 든다. 카톡으로 덕담을 보내오는 친구들이 크게 늘어난 걸 보면 나만 따분한 게 아닌 듯하다. 변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초래한 ‘새로운 일상(뉴노멀)’ 탓이다.
바이러스 때문인지 카톡 글 중에는 건강, 특히 걷기를 독려하는 내용이 많다. 안 그래도 나는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동네 길을 산책한다. 걷기 같은 유산소운동이 노화과정을 늦추는 첩경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평평하고 딱딱한 콘크리트 보도가 트레드밀 같아서 어정쩡하다. 작년까지 20년간 시애틀에서 살면서 매 주말 등반했던 아름다운 고산준봉들이 눈에 선해진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그리피스 팍이다. 지난봄 한국일보사 주최 거북이마라톤에 참가했다가 반했다. 물론 울창한 숲, 기암괴석에 폭포와 호수까지 고즈넉하게 깃든 시애틀 산들에 비하면 뒷동산 같다. 대부분 땡볕에 먼지 나는 흙길(소방도로)을 걷지만 오르막이 많고 굽이마다 펼쳐지는 광활한 LA의 도시전망이 눈부시다. 밋밋한 동네 콘크리트 보도보다는 백번 낫다.
그리피스 팍(4,310 에이커)은 전국 대도시 중 최대급 도심공원이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팍의 4배, 뉴욕 센트럴 팍의 5배다. 여의도보다도 6배나 넓다. 동서남북으로 거미줄 같이 뻗은 등산로(trails)의 총 연장길이가 50마일을 웃돈다. 골프장과 테니스코트와 유원지가 여기 저기 있고 동물원, 박물관, 승마장, 회전목마에 미니기차 궤도까지 갖춘 LA 시민들의 보배다.
이 널따란 공원에서 발길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할리웃 산(Mt. Hollywood)이다. 360도 전망을 자랑하는 정상(1,625 피트)에서 매년 1월1일 아침 생면부지의 동포들이 모여 신년하례를 한 후 목사님의 축복설교를 듣고 둥글게 둘러서서 동요 ‘고향의 봄’을 합창했던 옛날 기억이 새롭다. 이곳에선 요즘도 어김없이 많은 한인들과 조우하게 된다. 내 또래들도 꼭 있다.
할리웃 산의 가장 편한 트레일헤드(들머리)는 유명한 그리피스 천문대 주차장이다. 왕복 2.5마일에 가득고도가 고작 500피트다. ‘베를린 숲’ ‘티파니’ ‘캡틴 루스터’ ‘단테’ 등 쉼터 겸 전망대를 거쳐 간다. 천문대 주차장은 오전 중엔 공짜지만 정오부터 시간당 15달러를 내야 한다. 그래서 산책객들은 십중팔구 주변에 산재한 다른 들머리들을 이용한다.
뭐니뭐니 해도 이곳 최고명물은 ‘HOLLYWOOD’ 사인판이다. 할리웃 산 서쪽 리 산(Mt. Lee) 등성이에 세워져있다. 상대적으로 ‘빡센’ 트레일을 올라가더라도 사인판은 철조망에 가로막혀 접근불가다. 송신탑이 즐비한 리 산 정상(1,709 피트)에서 거대한 사인판의 뒷면만 부분적으로 내려다보인다. 철조망엔 엉뚱하게 ‘사랑의 자물쇠(love locks)’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최고봉 ‘카헹가 피크(1,821 피트)’ ‘벌 바위(Bee Rock)’ ‘지혜의 나무’ ‘아밀 정원’ ‘시더 그로브’ 등도 인기코스다. 산토끼가 지천이고 사슴, 코요테, 방울뱀도 눈에 띈다. 산사자(쿠거) 경고판이 겁을 준다. 연간 1,000여만 명이 찾는 도심공원이지만 자연의 숨결이 역력하다. 구글에서 Griffith Park trails를 검색하면 이 공원의 다양한 등산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지난 6월 이후 20여개 트레일을 섭렵했다. 공기 좋은 새벽녘에 산길을 한 시간 걸으면 옷이 땀에 흠뻑 젖는다. 동네 길과 다르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콕’하며 립 반 윙클을 흉내 내면 바이러스 아닌 노인병으로 먼저 죽을지 모른다. 면역력 증진이 최상책이다. 그리피스 팍엔 마스크나 거리유지가 필요 없다고 느껴지는 한적한 트레일이 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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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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