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원래 교향곡 작곡가였지 오페라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가 남긴 오페라 ‘피델리오’는 베토벤에게 있어서 흑역사의 하나로 남게 되었는데 베토벤과 오페라는 처음부터 어울지지 않는 한 쌍이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았는지 오페라라고는 ‘피델리오’ 단 한 작품밖에 남기지 않았는데 그 역시도 성공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성악이 가미된 극음악이라면 모를까 ‘피델리오’는 여러모로 오페라라고 부르기에는 결함이 많은 작품이었다. 물론 음악적으로 ‘피델리오’는 베토벤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 수작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에 음악을 덮어 씌운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오페라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연 당시 ‘피델리오’의 실패 요인은 이 점에 있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이러한 다소 투박한 요소가 오히려 하나의 성격 작품으로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은 베토벤 팬들에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18세기 후반, 이태리 오페라에 뒤처져 있던 독일 오페라의 중흥을 이끈 선봉장이 바로 모차르트였다. 당시까지 오페라하면 이태리 오페라가 주류였고 모차르트의 작품도 독일어로된 오페라라고는 1790년에 발표된‘요술피리’(魔笛) 그리고 ‘후궁으로부터의 탈출’ 단 두 작품 밖에 없었다. 특히 ‘요술피리’는 모차르트의 최후를 장식한 작품으로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은 아랍 동화였는데 이 작품이 대박을 친 것도 특이할만한 사건이었지만 더욱 기적적이었던 것은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베토벤까지 감동시켰다는 점이었다. 베토벤이 ‘요술피리’를 보고 오페라에 도전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는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그로부터 15년 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가 탄생하게 된다.
베토벤은 오페라로 떼돈 벌 수 있다는 동생 등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스타일로 투지를 불태웠는데 그 과정은 난산에 가까웠다. 당시 유행했던 오페라 유형은 베토벤의 신념과 맞지 않았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신만의 오페라를 성공시킬 수 있을지 여부도 미지수였다. 아무튼 베토벤은 착수에서 완성까지 무려 9년이라는 세월을 소비, 1805년에 비로소 비인에서 막을 올리지만 초연은 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작품성은 차치하고 나폴레옹군이 비인으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극장을 메운 사람은 독일어를 모르는 프랑스 장교들이 대부분이었다. 4개월 뒤 대폭적인 수정을 거쳐 재 공연을 추진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델리오’가 제대로 인정받게 된 것은 오페라가 초연된지 9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는데 그나마 베토벤이라는 이름 아니었으면 벌써 사장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피델리오’의 가치는 대중성, 시장성보다는 특별성에 있었다고해도 무방했다. ‘피델리오’는 당시의 오페라의 성향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갔던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어둡고 무뚝뚝하며 대중성보다는 메세지가 확실했던, 가공되지 않은 하나의 원석으로서 오늘날에 있어서까지 많은 음악가들, 그리고 지휘자들에게 도전 정신을 심어주고 있는 것은 ‘피델리오’의 운명이자 또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魔笛’ 이후 베버의 ‘마탄의 사수’(1821년 초연)가 나오기까지 독일 오페라는 다소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그 사이에 끼어 있었던 ‘피델리오’는 여러모로 베토벤에게 있어 아픈 손가락이었다. 서곡을 4번씩이나 고쳐가며 나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고 또 초연의 실패 이후 여러차례 개작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과 불화를 겪게 된 베토벤은 제 2탄을 터트리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피델리오’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올 9월에 열릴 예정이던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시즌 개작막으로 선정됐으나 COVID 19로 전격 취소, 초연 당시의 악몽을 다시 한번 재현했다. 그러나 도전 없는 인생이 그렇듯 도전없는 베토벤 또한 김빠진 맥주나 다름없다.
베토벤은 1798년 프랑스 작가 장 니콜라 부이의 연극 '레오노르’에 큰 흥미를 느껴 변호사이자 극작가였던 요제프 존라이트너에게 독일어 번역과 오페라 대본 각색을 의뢰했다. 스페인을 배경으로 레오노르라는 여인이 피델리오라는 남자로 변장, 억울하게 갖힌 남편을 구한다는 내용으로 문학성은 범작 수준이었지만 여인의 순수한 사랑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느꼈던 순정파 베토벤과 당시 자코뱅 당파가 수많은 반대파들의 목을 날리던 공포 정치 분위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꽤 인기를 모은 작품이었다. 오페라는 1805년 가을 원작에 따라 ‘레오노레’라는 이름으로 빈에서 초연되었고 1814년 개작을 거치면서 ‘피델리오’라는 이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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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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