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건포도를 싫어하는 이들이 은근히 많다는데 놀랐다. 특히 빵에 든 건포도라면 사족을 못 썼던 지라 나름 충격을 받았다. 단순한 불호의 수준을 넘어 증오에 이르는 감정을 품는 경우도 종종 발견했다. 오이 같은 채소야 싫어하는 까닭을 유전자의 탓으로 돌려버릴 수 있으므로 별 느낌이 없다. 하지만 건포도는 왜 이다지도 깊은 미움을 사는 걸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건포도의 장점이 거울상이 되며 단점으로 작용한다. 살짝 저항해 씹는 맛을 주는 껍질은 질기고 말랑한 속살은 물컹하다. 수분이 빠져 얻어내는 달콤함은 선을 넘는 단맛으로 다가오며 나름 귀엽다고 생각하는, 쪼글거리는 모양새도 벌레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건포도를 싫어한다면 빵이나 과자에 섞여 접할 경우 크게 분노한다. 외따로라면 선택하지 않을 식재료에게 기습을 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싫어하지 않는 이들에게조차 건포도는 그렇고 그런 식재료일 수 있다. 흔해서 잊고 있다가 결국 빵이나 떡 등에서 가끔 접하고는 한 번씩 존재감을 재확인하는, 삶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는 식재료 말이다. 뜯어보지 않으면 구분이 잘 안돼서 세상에 건포도가 단 한 종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도 미약한 존재감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일단 가장 기본부터. 특화된 품종이 따로 있으니 씨가 없는 톰슨(Thompson)이나 플레임(Flame)을 햇볕 혹은 기계로 건조해 건포도를 만든다.
톰슨은 청포도이지만 말리면 수분이 빠지면서 갈색으로 진해지는데, 이와 별개로 온ㆍ습도를 조절해 노란색에 가깝게 말린 건포도를 ‘설타나(sultana)’ 혹은 ‘금 건포도(golden raisin)’이라 일컫는다. 원칙은 톰슨을 이렇게 말려 만든 결과물만 설타나라 부르지만 요즘은 품종에 상관 없이 이산화황 등으로 처리해 노란색을 띄도록 가공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가 고향인 블랙 코린스(Black Corinth)를 말리면 ‘커런트(currant)’가 되는데, 우리가 흔히 커런트라 부르는 까막까치밥나무, 즉 블랙커런트(blackcurrent)와는 다른 식재료이다.
◇아침식사로도 술안주로도 두루 활용
적당한 강도의 응축된 단맛과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기에 건포도는 그냥 먹어도 좋지만 다른 식재료의 맛을 돋워주는 역할에 빼어나다. 빵이나 떡에서 그렇듯 음식 내에서 일종의 반찬 역할을 맡는 것이다. 가장 흔한 예가 ‘트레일 믹스 (Trail Mix)’라 일컫는 모둠 견과류 속의 존재감이다. 고소하지만 단조로울 수 있고 딱딱함 일색인 견과류에 건포도를 드문드문 섞어 주면 단맛과 신맛으로 지루함을 덜어주는 한편 질감의 대조까지 맛볼 수 있다. 말하자면 건빵 속의 건강한 별사탕 노릇이랄까? 이래저래 아몬드를 필두로 호두, 브라질넛 등 모든 견과류에 두루두루 잘 어울린다.
이러한 견과류와 건포도의 상성을 참고하면 ‘가성비’ 높은 건강식을 간편하게 스스로 챙길 수도 있다. 견과류의 전성시대인지라 소포장된 제품을 쉽게 살 수 있는데, 아무래도 간편함과 가격을 맞바꾼 지라 계속 먹다 보면 지출이 은근히 커질 수도 있다. 이런 느낌이 온다 싶으면 좋아하는 견과류를 500g 안팎의 단위로 인터넷에서 구매해 밀폐 용기에 섞어 담고, 건포도만 한 입 분량으로 소포장된 제품(대체로 종이팩에 담겨 있다)을 별도로 준비해 함께 둔다. 그리고 출출할 때 직접 배합한 견과류 모둠 한 줌에 건포도 한 곽을 먹으면 맛과 영양의 비율이 얼추 맞는 건강 간식이 된다.
그런데 굳이 건포도만 따로 준비해야 되는 이유가 있을까? 아무래도 건포도가 견과류와 달리 당분이 많은 과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표면이 끈끈해 대용량을 살 경우 손으로 집어 먹기 불편하며, 양 조절이 미리 되지 않을 경우 넋을 놓고 집어 먹다가 본의 아니게 많은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다. 한편 건포도가 딱딱한 견과류에만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일단 치아 건강 등을 이유로 견과류를 피한다면 바나나에 건포도를 짝지어 먹을 수도 있다. 바나나도 단맛 위주의 과일이지만 경우에 따라 싱거운데, 이때 건포도를 비장의 조미료처럼 써 간을 맞춰줄 수 있다. 3대 간편 아침 식사인 시리얼, 오트밀, 요구르트에도 건포도가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이렇게 간편한 아침식사로 시작한 하루의 끝에서도 건포도가 제 몫을 톡톡히 발휘할 수 있다. 너무 보람차서, 혹은 정반대로 너무 좌절스러워 잠들기 전 한 잔 생각이 간절하다면? 건포도가 예상 외의 모범적인 술안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도수가 높은 증류주라면 종류는 다를 수 있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말린 과일의 향을 품고 있다.
따라서 말려 농축된 향과 단맛을 지닌 건포도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식재료 가운데서는 가장 잘 어울리는 안주이다. 가장 고전적인 짝으로는 열대의 맛과 향을 품은 럼을 꼽지만 아무래도 병을 모셔 두고 잔술로 조금씩 마시는 리큐어 혹은 스피릿이라면 위스키, 특히 ‘e’가 빠진 스코틀랜드의 싱글 몰트(whisky)가 좋다. 건포도만으로 조금 심심하다면 초콜릿을 살짝 짝지어주자. 내일 걱정일랑 터럭만큼도 하지 않고 즐겁게 마시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조합이 너무 좋아 과음을 부추길 수 있으니 절제의 미덕을 잊지 말자.
◇당근과 찰떡궁합
건포도의 미덕을 이처럼 상세히 소개해도 싫어하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음식과 취향이란 대체로 설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과감하게 한쪽으로 가보자. 건포도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역시 크게 애정을 품을 것 같지 않은 식재료와 짝을 지어주는 것이다. 당근 말이다. 설사 건포도를 좋아하더라도 당근까지는 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쉽게 사랑을 받는 식재료는 아니지만, 놀랍게도 둘은 아주 잘 어울린다. 특히 요즘처럼 햇당근이 등장하는 시기라면 한 번쯤 둘의 가능성에 명운을 걸어볼 만하다. 물론 하늘이 둘(과 요리하는 우리)을 돕느라 조리법도 더 이상 간편할 수 없다.
당근 1㎏을 준비한다. 잘 씻어 치즈 강판(*박스 기사 참고)에 조금 굵다 싶게 간다. 한편 올리브기름(125㎖), 사과 사이더 식초(6큰술), 꿀(2큰술), 머스터드(1큰술), 소금과 후추(각 ½큰술)을 대접에 담고 거품기로 섞어 드레싱을 만든다. 간 당근과 건포도(한 줌)을 넉넉한 크기의 대접에 담고 드레싱을 끼얹어 골고루 잘 버무린다. 이렇게 샐러드가 완성되었다. 구운 돼지고기와 특히 잘 어울리며, 단맛을 보강해주고 싶다면 파인애플 통조림을 다지듯 썰어 같이 버무려도 맛있다.
10~15분이면 만들 수 있는 샐러드로 건포도와 당근의 시너지 효과를 확인했다면 같은 원리와 재료로 따뜻한 음식에 도전해보자. 같은 양의 당근을 1㎝보다 조금 얇게, 0.7㎝ 안팎으로 나박나박 썬다. 중불에 달군 넓은 팬에 기름을 살짝 둘러 달군 뒤 썬 당근을 올리고 소금 1자밤, 설탕 2자밤을 솔솔 뿌린다. 당근이 지글거리며 익기 시작하면 잠길락말락할 정도로 물을 자작하게 붓고 끓기 시작하면 약불로 줄인다. 물이 보글보글 끓는 가운데 버터를 2큰술 더해 조리듯 서서히 익힌다.
당근이 익는 가운데 양파나 샬롯을 아주 얇게 썰어 건포도 한 줌과 함께 더하고 포크나 칼로 찔렀을 때 저항하며 들어가는 상태까지만 익힌다. 남은 열이 당근을 딱 먹기 좋은 상태로 익혀주는 게 핵심이므로 과조리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칼날이나 포크 끝이 푹푹 들어가기 시작하면 당근 혐오파가 ‘거봐, 내가 당근 먹지 말랬지?’라며 비웃는 곤죽이 될 수 있다. 불에서 내려 접시에 옮겨 담고 쪽파를 솔솔 뿌린다. 그렇게 건포도 당근 볶음이 완성되었다. 따뜻할 때 먹어도 좋지만 식으면 단맛을 한층 더 느낄 수 있다.
◇건포도 오믈렛
혹시 다른 음식의 맛을 북돋워주는 데만 쓰이는 건포도의 팔자에 못내 아쉬움을 느낀다면 오믈렛을 생각해볼 수 있다. 건포도를 오믈렛에 넣는다니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건포도 오믈렛은 내가 번역한 ‘이탈리아의 요리 바이블 실버 스푼’에 레시피가 실릴 만큼 어엿한 요리이다. 계란이 소금(짠맛)과 설탕(단맛) 양쪽 모두를 잘 받아들이며, 후자를 쓴 오믈렛이 디저트의 한 장르임을 헤아린다면 충격이 좀 덜할 수도 있겠다. 일단 건포도 한 줌을 공기에 담고 따뜻한 물을 잠기도록 부어 30분 가량 불린다. 건포도가 수분을 흡수해 통통해지면서 주름이 적당히 펴지면 준비가 된 것이다. 계란 6개를 대접에 담아 풀고 백설탕 2큰술을 더해 잘 섞는다. 약불에 프라이팬을 올려 달구는 사이 건포도를 건져내 종이 행주로 싸 물기를 가볍게 짜낸다. 달궈진 팬에 푼 계란을 붓고 펼쳐 절반쯤 익으면 건포도를 가운데에 올린 뒤 양쪽 가장자리를 스패출러로 들어올려 덮어준다.
접시에 미끄러트려 옮겨 담은 뒤 설탕 한 자밤쯤을 표면에 솔솔 뿌려 마무리한다. 건포도는 일부러 계량을 하지 않았으니 계란 6개 당 한 줌으로 시작해 비율을 조정해가며 입맛에 맞는 양을 찾아보자. 또한 건포도의 절반을 말린 살구, 자두 등으로 대체해 좀 더 다채로운 맛도 낼 수 있다.
◇치즈강판으로 당근이나 감자 채 썰기
치즈 강판은 이름이 그래서 늘 헷갈린다. 치즈를 즐겨 먹지 않는다면 필요가 없는 조리 도구인가? 샐러드를 위한 당근을 갈아내듯 전혀 그렇지 않다. 서양에서 단단한 덩어리 치즈를 채로 갈아내는데 주로 쓰기에 이름이 그렇게 붙었을 뿐, 치즈와 무관한 식생활을 꾸려 나가는 이에게도 굉장히 쓸모 있다. 강판을 거친 결과물이 갈아낸 것보다는 채로 쳐낸 것에 가깝고, 또한 채로 쳐낸 것보다는 갈아낸 것에 가까우니 특유의 질감이 요리의 가능성을 한결 넓혀 준다.
당근 샐러드가 아니라면 여름에 본격적으로 맛있는 감자전에도 쓸 수 있다. 칼로 채친 것보다는 감자가 얇고도 부드러워지는 데다가 전분이 좀 더 배어 나와 강판에 즙처럼 갈아낸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감자전을 부칠 수 있다. 사면에 다른 굵기의 눈이 달려 있어 다양한 굵기로 채를 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종종 공간 절약을 위해 접어 보관할 수 있는 제품도 보이는데 갈 때 힘이 잘 안 들어가므로 피한다. 인터넷 오픈마켓에서 1만원 안쪽에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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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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