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고
▶ 6.25전쟁 70주년, KLO 유격부대와 민간인‘지게부대’
이병희 / 미 한국전참전용사 기념재단 이사
이병희 이사(89, 예비역 중령)는 워싱턴 재향군인회장과 6.25 참전유공자회장, 카투사전우회장 출신으로 미국에서 지난 40년간 향군·안보단체에서 활동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2년 1월 광주보병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고 월남전에도 참전했으며 1971년 육군 중령으로 제대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1군단 소속으로 참전, 함흥과 성진까지 북진했다. 이후 육군본부 직할 첩보부대(HID)에서 근무하면서 KLO와 KSC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6.25전쟁 당시 비정규군으로 후방 유격과 첩보활동의 특수임무를 수행한 미군 산하 8240부대(주한첩보연락처, 일명 켈로부대)원들이 중공군 복장을 하고 북한으로 침투하기 직전 모습.
징용된 KSC 근무대원들이 대구 보충대에서 입대 수속후 전방으로 출동하기 직전 지게를 지고 장비 감사를 받기 위해서 도열하고 있다. 1951년 전쟁기념관 제공.
한국전쟁은 1950년 6월25일 새벽,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38도선의 전 전선에서 선전포고 없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됐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6월 27일, 유엔 창립 후 처음으로 침략당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국가는 전투참가 16개국을 비롯한 의료지원 5개국, 물자지원국 등63개국이었다. 이 전쟁으로 유엔군 37,902명(미군 33,686명) 전사자에 103,460명의 전상자, 3,950명의 실종 및 5,817명의 포로가 있었으며 138,000여명의 국군 전사자, 450,000여명의 전상자와 실종자 159,000여명 그리고 우리 국민 200여만명의 희생과 막대한 재산피해로 온 국토가 폐허가 됐다. 그분들의 고귀한 생명의 대가로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번영한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오늘의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와 절망의 끝자락에서 다시 일어선 위대한 역사의 승리의 결과로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중 계급도 군번도 없는 비전투원(민간인) 신분으로 유엔군(미군)의 직, 간접적인 전쟁지원에 참가한 유격첩보부대(KLO)및 전투지원수송단(KSC)대원들의 알려지지 않은 영웅적인 공로의 재조명은 미래를 여는 역사의 지혜라고 본다.
#유격첩보부대(일명 KLO 8240부대)
6.25전쟁 중 소위 부산 전선으로 알려진 낙동강 방어 작전과 인천상륙작전 시기에 38선 이북지역작전에 투입한 유격대원들이 있다. 유격첩보부대(일명 KLO 8240부대)는 미 극동군사령부 산하 특수부대로 주로 38선 이북(현안, 황해, 함경도) 출신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통상 북한군 복장에 경무장으로 북한에 인접한 동, 서해안에 산재한 도서(섬)에 배치되어 단기간의 미 육군 훈련과 보급으로 유격전투부대로 발전했다. 북한 침투경로는 주로 선박편을 이용한 해안이었으나 일부는 비밀공작과 정보 수집을 주 임무로 한 공중 낙하산 투입도 있었다.
이들 유격대원들은 휴전 때까지의 병력이 6,000명에서 23,00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유격작전을 통하여 유엔군과 미군의 전쟁지원에 크게 공을 세웠으며 대표적인 성공적인 작전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펼치는데 인천항구의 입구통로를 조명해 줄 수 있도록 입구에 위치한 등대를 공산군 측으로부터 탈취, 점유하는 정보를 얻어 용감하게 탈취 점유를 성공시켰다.
2. 원산항 침투작전은 유엔군이 북한군이 세균전을 편다는 허위(흑색) 선전을 하기 위해 북한 인민군 시체를 납치한 작전으로 유격대원들이 그 역할을 했다.
3. 낙하산 투입의 비밀공작(첩보) 작전에서 85퍼센트가 체포되고 막대한 전사의 피해로 생환하지 못했다.
4. 서해안의 유격대(통키연대)는 1952년 7월부터 1년간 2천여건의 작전으로 5천여정의 무기나포를 비롯해 80여 교량 파괴 및 2천여대의 파괴, 3천톤 이상의 식량 창고의 파괴와 포로수용소 공격 등으로 다수의 미군 포로를 구출했다.
5. 1951년 3월 21일 황해도의 장연, 안악, 은율, 송화 등 지역출신으로 구성된 구월산유격대(동키2연대)는 월사리 반도작전에서 공산군 239명 사살, 54명의 생포전과를 비롯해 수많은 대소 유격작전을 수행했다.
6. 북한 공습출격에서 격추된 미 공군조종사 스친스 대령(후에 준장 승진) 구출작전에 성공했다.
7. 유격대의 수많은 공작, 작전으로 공산군 측은 10만명의 병력을 전방에서 후방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로 최전방에서는 다수의 유엔군과 미군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었다.
70년 전 무명 유격용사들의 작전활동 실상에 대한 비밀이 50여년만인 1987년 해제된 현재까지도 미국 측의 인정이 안된 상태에서 지난 18년간 한국 중앙유격대 참전전우회 참전기념비 건립과 추모행사를 해오던 중 처음으로 지난 2019년 10월 20일 서해안 교동도에서 한국 육군 특전사 후원과 주한 미 특전사령관 오또릴러 준장이 추모사를 한 뜻있는 추모행사가 있었다.
# 미 육군 전투지원수송단(일명 KSC)
1950년 6.25 전쟁초기 낙동강을 따라 아군의 방어선인 다부동작전으로 위급한 전황에 다달았을 무렵 미군은 탄약및 보급품이 절실했고 월튼 H중령은 워커 미 8군사령관으로 하여금 한국정부에 긴급 보급수송 인력을 요청하게 됐다.
이에 따라 15-60세 남성으로 구성된 민간수송단이 결성되었으며 주로 준군사 훈련자로 구성된 민간인 수송단은 다음해 1951년 7월 제임스 반함대 장군의 지휘 아래 한국 근무부대(KSC)로 재조직되었다.
KSC는 101, 103, 105 근무사단 이외 100 및 200 두 여단이 따로 조직되었으며 이 부대들은 전선의 미 육군 제 1, 9, 10군단에 각각 1개 KSC 사단이 배치되어 전투수송 지원 임무를 수행했으며 오늘날까지도 KSC로 부르며 일명 지게부대(A-Frame Army)로 애칭되기도 했다.
KSC는 전시에 13만3천명 이상의 최대 인력이었으며 이들의 임무는 열차와 차량수송이 불가능한 험준한 산악지형과 혹독한 기상조건에서 보통 10마일 이상의 거리에서 주로 탄약, 야전식량(레이숀), 의료용품 및 기타 전투용품을 50파운드 이상 지게를 이용해 도보로 운반하는 중노동이었다.
특히 어려운 조건은 전투상황에서 전사자와 부상병의 후송임무였으며 주요 전투작전은 Pork Chop Hill, Old Baldy, Carson, Vegas 및 Punch Bowl 작전 및 기타 극심한 적군과의 혈전에서의 많은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이들은 낮 시간에 벙커 구축을 비롯한 필요한 공사작업을 돕기도 했다. 1953년 7월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30만명 이상이 KSC부대원으로 참전했으며 미국의 동맹들과 마찬가지로 2,064명이 사망했으며 4,282명 부상, 2,448명이 실종되는 막대한 인명피해가 있었다.
휴전 이후 KSC는 노무인력의 필요성에 따르는 유연성과 적응성을 유지하게 되며 1994년에 한반도지역에 187개 기업에 22,932명의 인력을 배치할 준비로 새로이 KSC BN(대대)로 재구성됐다.
이 대대는 평시 동원훈련을 실시하며 전시대비능력을 시험하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군을 지원할 노무자와 숙련된 전문가로 구성된 Go to way 조직으로 즉 전쟁의 준비 조직이다. KSC는 언제, 어디서나 한반도에서 한, 미 동맹을 유지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기본적인 motto인 ‘Service First’(봉사제일) 정신에 충실할 것이며 한, 미 양국은 지금까지 함께 일해 왔으며 오늘 그리고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날 KSC의 세 가지 특징은 첫째 통상적으로 평시 주 40시간 미군부대 근무의 인력확보, 둘째 특수 전문적인 숙련도 유지로 전쟁전환 배치준비, 셋째 미8군의 전쟁전환 때의 동원수송부대 구성 등 철저한 전쟁 준비태세에 대한 종합비상계획이 수립되어 있다.
#맺는말
위와 같이 전쟁 중 KLO, KSC 부대원들은 군 계급, 군번도 없는 비전투원(민간인) 신분으로 적군의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을 극복하면서 KLO는 공중 낙하산 투하와 육상도보 및 해상침투를 통하여 북한지역에서의 유격전투 작전 및 첩보수집 공작 임무수행에 헌신했다.
또한 KSC는 전투작전 지원임무인 탄약, 식량, 의료품의 도보운송을 비롯해 전사자, 부상자 후송으로 미군의 생명구호에 기여한 큰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되며 진정한 피 흘린 한미 혈맹을 증명하였으나 아직도 미국 정부의 공식 인정은 물론 아무런 참전보상의 혜택도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6.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수많은 이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나라사랑의 희생적인 공로와 명예를 영원히 바치고 후세에 남기는 역사의 증표로 건립될 ‘국립한국전쟁참전 추모의 벽’(Wall of Remembrance)에 그들을 위한 ‘추모 비문’이 새겨지기를 바란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