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네에 살았던 초로의 부부가 이혼을 했다. 부부사이가 무척 좋다고 느꼈는데 의외였다. 요새 황혼이혼이 부쩍 유행이지만 실은 이 세대는 어느 세대보다 헤어지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미우나 고우나 한 평생 몸 비비며 살아온 정이 너무 두텁고 끈끈해 서다. 무슨 큰 이유가 없으면 그대로 눌러 산다.
남자들이 은퇴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아내와 부딪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배우자의 부정이나 경제적 파탄 같은 큰 문제가 아닌 사소한 일상사, 특히 서로의 기억력과 연관이 있는 사건이나 소통방식 때문에 싸움이 잦아진다. “내 물건 여기 두었는데 당신이 내다 버렸어?” 혹은 “무슨 말투가 그래” 등의 짜증 섞인 불만이 종종 싸움의 발단이 된다.
나이가 들면 일반적으로 자기중심적이 되고 고집이 세지며 양보와 배려심이 부족한 아이들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남자노인들은 특히 아내를 어렸을 때 자기 말을 모두 들어 주었던 어머니로 착각한다.
노인 부부가 격하게 싸우다보면 서로 있는 말 없는 말, 해서는 안될 말까지 거침없이 내 뿜는다. 자기만 생각한다느니, 이중인격자라느니, 그런 소갈머리로 일(은퇴 전 직업)은 어떻게 했느냐, 무슨 남자가 그리 쩨쩨하냐… 하다 보면 급기야 이혼이란 단어까지 튀어 나온다. 평생 살아오며 이혼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온 적 없다면 진짜 부부싸움은 안 해본 것이고, 좀 불려서 말하면 인생살이다운 삶의 맛을 못 보았을 거라는 궤변도 해본다.
무슨 싸움이든 피차 잘못이 있지만 심한 말을 들으면 무척 서운하다. 하지만 며칠 간 서로의 감정을 삭이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면 왜 자주 싸울까? 나대로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첫째, 전전두엽 기능의 저하다. 30대에 들어 뇌세포 수가 점점 감소하면 자연히 뇌기능도 줄어든다. 다른 신체 장기의 세포들은 죽거나 감소하면 다시 만들어지는데 뇌세포는 태어날 때 이미 숫자가 정해져 있다. 물론 어느 뇌 영역의 세포가 적어지면 주변 뇌세포 간의 연결망이 새로 생겨 어느 정도 부족한 기능을 보상해 줄 수는 있다.
이마 바로 뒤 옆에 놓여있는 전전두엽은 발생학적으로 가장 늦게 발달하며 인간의 복잡한 사고, 감정, 언어, 행동을 주관한다. 인간본성인 오욕칠정의 충동성을 잘 다스려 도덕적, 윤리적, 합리적인 인간다운 인격체를 형성하는 뇌 영역이다. 이 부분의 기능이 잘 안되면 충동성 결핍으로 싸움이 잦아진다.
둘째, 성 호르몬의 불균형이다. 모든 신체 호르몬의 균형을 유지하는 뇌 영역은 대뇌 깊숙한 곳에 있는 시상하부다. 이 곳의 기능저하로 여성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젠이 적어지고 대신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많아져 보편적 여성 기질인 부드러움, 수동적 태도가 거칠고, 능동적 태도로 변한다. 남성은 이와 반대다.
셋째, 칼 융의 분석심리 개념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각 개인의 유전자에는 이미 오랜 세월 인류가 살아오며 경험한 중요한 정보들이 새겨져 있다. 이런 정보들은 전설, 신화, 습관, 얼굴표정, 문화예술 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나는 개인의 내가 아닌 모든 사람과의 공통점을 가진 소우주 속의 나인 것이다. 융은 이를 집단무의식이란 개념으로 생각했다.
무의식의 한쪽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집단무의식 속에는 나(자아)를 형성하는 정신적 원형인 페르소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가 있다. 페르소나는 자연과 주위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나로 진짜 내가 아닌 외부로 나타나는 가면의 모습이다. 그림자는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추고 싶은 어두운 감정, 생각, 욕망, 행동들이다. 이를 프로이드는 콤플렉스라 주장했다. 아니마는 남성 속에 숨어있는 여성적 특징, 아니무스는 여성 속의 남성적 특징이다.
즉 인간은 페르소나와 그림자가 섞인 이중적 인격체고,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인한 양성적 존재로 한 개인이 성숙한 인격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4가지가 잘 조화되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내 안에 있는 양성적 경향이 힘을 잃을 경우 자연히 싸움이 잦아지는가 싶다.
황혼싸움은 어찌 보면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인지도 모른다. 깊게 감추어둔 그림자인 콤플렉스가 투사라는 방어기전을 통해 배우자에게 전달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부부싸움 후에는 반드시 내면의 나를 응시하며 진짜 나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해야만 싸움이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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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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