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페스트’(La Peste)를 다시 읽었다. 코로나19 이후 이 책의 판매가 세계 각국에서 급증했다고 한다. 전염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데다 자택 격리로 책 읽을 시간이 많아졌고, 올해가 카뮈(1913~1960) 타계 60주년이라 재조명되는 측면도 있는 듯하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이자 재난소설의 효시로 평가받는 ‘페스트’는 흑사병의 창궐로 봉쇄된 도시에서 재앙에 대처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카뮈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서 지하신문을 만들며 저항하던 중 이 소설을 구상, 종전 후 발표했다. 당시 폐렴을 앓았던 그는 전쟁·질병·고립·투쟁 등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재난에 처한 사람들의 일상과 심리를 일기 쓰듯 파헤쳐 보여준다. 분노도 비통도 연민도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하고 메마른 문체가 오히려 강렬한 위기의식을 던져준다.
카뮈가 처음에 생각한 제목은 ‘페스트’가 아니라 ‘수인들’이었다. 즉 폐쇄된 도시 안에 ‘갇힌 사람들’ 이야기다. 그들의 반응은 동서남북처럼 다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기를 쓰는 사람, ‘재앙은 신의 징벌’이라는 신부, 역병에 맞서 싸우며 도전하는 의사, 암거래로 돈을 벌며 재앙을 즐기는 범법자···.
페스트와 코로나19는 매우 다른 전염병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피할 수 없는 극한상황에 고립된 인간의 실존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코로나19로 세계인구(78억명)의 거의 절반이 지역봉쇄나 이동제한으로 발이 묶여있으니, 시대와 상황과 규모가 다르긴 해도 재앙과 고립에 맞닥뜨린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간략한 줄거리에서 ‘페스트’를 ‘코로나19’로 대치해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 북부의 평범한 도시 오랑에서 어느 날 죽은 쥐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곧이어 흑사병이 창궐하고 사람들이 참혹한 고통 속에 죽어간다. 관료주의, 무능, 위선에 젖은 도청은 페스트를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조용히 사태를 무마하려 한다. 하지만 감염자와 사망자가 폭증하면서 비상사태와 계엄령이 선포되고 도시는 봉쇄된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도시는 구급차의 사이렌소리, 화장터에서 내뿜는 연기, 벼룩 전파의 위험성이 있는 개와 고양이들을 쏘아죽이는 총소리가 뒤엉키는 생지옥이다.
곧이어 식량보급이 제한되고 휘발유는 배급제가 되며, 절전에 등화관제까지 실시된다. 가게들은 나날이 문을 닫고 엄청난 실업자가 생기면서 경제생활이 파괴된다.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상승하고 생활필수품이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린다. 봉쇄가 길어지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한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도시를 탈출하려하고, 방화와 약탈, 절도가 자행된다.
병상과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하다. 도시의 호텔들과 학교, 모든 공공건물과 시립운동장에 임시병원과 격리수용소가 설치된다. 쌓이는 시신은 장례식도 없이 시 외곽의 구덩이에 매장된다. 마스크의 필요성에 대한 보건관계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당국을 믿지 못하는 뜻있는 사람들은 자원보건대를 조직하여 의료진을 돕는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경악하고, 부인하고, 공포와 패닉에 휩싸이지만 막장 상황이 오래 계속되자 나중에는 자포자기, 무관심, 일부에서는 흥청망청한 나날을 보낸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일상과 감정과 도덕을 파괴해버린 페스트는 어느 날 들이닥쳤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약 10개월만이다.”
소설 ‘페스트’는 체념하거나 신에 기대지 말고 인간 스스로 최선을 다해 싸워야한다는 의사 베르나르 리외의 서술을 따라간다. 그는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려는 카뮈의 분신으로, 영웅주의를 배격하고 각자에게 맡겨진 직분을 성실히 완수하는 소시민들의 헌신이 투쟁의 원동력임을 강조한다.
소설에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구절이 있다. 재난은 인간성을 걸러낸다. 재난을 통해 이상하고 예기치 못한 행위들이 표면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취하고 누군가는 약탈하고 누군가는 영웅주의에 빠진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대량실업의 시대에 사회적 거리가 아닌 마음의 거리를 좁히며 약자를 위해 헌신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19의 퇴치를 위해 병원과 격리시설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 이기심보다 이타심을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해나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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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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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13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1940년대 소설속 상황과 2020년 우리가 맞닥친 코로나 팬더믹이 닮아서 끔찍하기만 합니다. 이런 난리통에도 약탈하고 사기치는 진화된(?) 군상들의 모습은 정말 뉴스에서 보기 싫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지만 이 망할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 힘든 것을 해 내네요. 고작 “집콕”밖에 할 수 없는 비상시국에 병원과 방역 최전방에서 쉼없이 싸우고 있는 의사, 간호사등 여러분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속 시원한 칼럼을 써주시는 정숙희 논설위원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러니까 내가 개인 위생수칙을 자꾸 강조하는 것이다. 위생수칙을 철저히 지키면 전체적인 샷다운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크루즈선과 같은 특수한 환경이 아니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수 있다. 4월말까지 연장한다니 기다려야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끌면 병걸려 죽는 사람보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제 클로로퀸이라는 흔한 약으로 치료예방이 가능하다고 하니 계절적인 독감처럼 대처하면 될 것이다.
딱한마디로 지금 영웅은 의사 간호사 이분들이 정말 영웅이네요
보통 신종독감은 시간이 흐르면 전체 인구가 다 면역이 생겨서 사라지고 이것은 보통 독감과 같은 것이며 독감이 크게 유행할때는 전체 인구 60%가 다 걸릴때도 있는데, 가령 독감이 크게 유행할때 많은 사람들이 콜록콜록 거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현재 코로나와 무슨 다른 것이 있는지. 이와같은 의견은 현재 반영이 안되는데, 이것이 사회적 히스테리 과반은이 아닌가.
작년 시즌 독감 사망자수는 61,000. 현재 코로나 사망자수는 3000. 작년 독감 감여자수는 4천4백만. 감염이 된다고 해서 다 사망하는 것은 아니며, 99% 이상이 치료없이 회복되고, 이는 보통 다른 독감과 다를바 없으며, 과연 전체 미국 경제를 셧다운하는 것이 과연 신종독감예방을 위해 필요한 조치인지. 그렇다면 왜 작년 6만1천명이 독감으로 죽었을때는 팬데믹이 아니며 왜 경제를 셧다운안했는지. 거의 매년 코로나와 같은 신종독감 바이러스가 발생하며, 이는 역병학자 이오나디스의 사실적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