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원조 문제 등 권력남용 혐의로 탄핵 재판을 받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상원표결에서 자신의 탄핵안이 부결되기 무섭게 풍부한 자금력이나 지명도 등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거물급 범죄자 11명을 사면 및 감형함으로써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 논쟁에 불을 지폈다.
지난 2월 18일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이나 감형을 받은 사람 중에는 매관매직을 시도한 전 일리노이 주지사 라드 브라고예비치(Rod Blagojevich)를 비롯 탈세로 징역형을 살았던 전 뉴욕시 경찰총장 버나드 케릭(Bernard Kerik), 부패행위로 유죄 선고를 받았던 미식축구팀 전 구단주 에드워드 디바르톨로(Edward DeBartolo)와 같은 유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언론과 야권에선 이번 사면이 통상 법무부에서 실시하는 기본적인 심사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트럼프의 정치적 목적과 사적 인연만을 고려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한 예로 루디 줄리아니(Rudy Giuliani)가 뉴욕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의 비호 아래 뉴욕시 경찰총장을 지낸 버나드 케릭은 헌신적인 자세로 2001년 9.11 테러를 훌륭하게 수습하여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던 인물이다. 이후 부시 대통령에 의해 국토안보부 장관 후보에 지명되어 꽃길을 걷는 듯했지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탈세와 뇌물수수 혐의 등이 언론에 폭로됨으로써 지명철회뿐 아니라 재판에 넘겨져 기구하게도 4년의 실형까지 살게 되었다. 뉴욕타임즈는 케릭의 이번 사면이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로 변신해 활약하고 있는 줄리아니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범죄를 용서하고 형벌을 면제해주는 사면제도는 중세 전제국가 시대에 전권을 행사하던 군주 은전권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삼권분립이 확립된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사법부의 결정에 대한 행정부의 간섭으로 여겨 채택하지 않는 게 원칙임에도 미국은 헌법 2조 2항을 통해 이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허용해주었던 것이다.
사실 영국 왕실의 사면권 남용을 직접 목도한 건국 당시 미국의 지도자들은 처음엔 대통령에게 사면권을 주지 않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강력한 연방 정부를 희구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주와 주간의 내전이나 독재정부에 항거하기 위한 민중봉기 같은 국가 위기상황에 봉착했을 때 사후 수습책으로 통치권력의 적절한 사면이 미국연방 전체의 안정과 통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를 구현하려면 다수로 구성된 다양한 목소리의 의회보다 ‘균형감각과 통찰력을 두루 갖춘 대통령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게 더욱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여 헌법에 대통령의 사면권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후 대통령들은 해밀턴의 입법취지에 부응이라도 하듯 미국의 화합과 안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면권을 행사했다. 예컨대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정부의 위스키 과세 결정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사면을 베풀었고, 남북전쟁을 북부의 승리로 이끌어 압도적 지지로 재선된 링컨 대통령이 재임초 암살당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은 남부연합군 장병들에게 죄를 묻지 않고 사면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 역시 자신의 취임식 바로 다음날 베트남 전쟁 징병 거부로 기소 및 수배된 20만여 명의 젊은이들을 무조건 사면함으로써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미국 연방제의 특성상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각자 독립적인 형벌 체계를 갖다 보니 대통령의 사면 범위는 연방법 위반자에게만 적용되고 각 주법 위반자는 주지사만이 사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관례상 정치인이나 경제인 같은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은 연방 검찰과 주 검찰의 수사공조를 거쳐 연방법원 또는 주 법원 한 곳에서만 처벌을 받았는데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죄인들이 트럼프로부터 사면을 받았음에도 다시 주 법원 재판에 넘겨질 것인지 여부가 주목된다. 왜냐하면 트럼프의 사면남발에 대한 대책으로 그들을 주법으로 다시 재판할 수 있도록 법을 보완하는 주들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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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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