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LA마라톤이 끝났다. 그날 아침 8시40분께가 되니까 벌써 남녀 우승자 이름과 기록 등이 속속 속보로 전해졌다. 그런 기록과는 관계없이 LA 마라톤은 2만5,000여 러너들의 축제였다. 마라톤은 혼자 뛰는 것 같지만 더불어 뛰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동료와 친구, 부부와 가족이 함께 뛰면서 완주자는 또 한 번 뿌듯한 성취감을 마음에 아로새기게 된다.
라 크레센타의 리처드, 이재훈 씨 가족에게는 이번 LA 마라톤이 특별했다. 전 가족 4명이 처음으로 함께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해 완주에 성공했다. 이를 위해 시애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과 딸은 휴가를 내고 내려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다저스 스태디엄을 출발해 샌타모니카에 이르는 26.2마일을 뛰었다.
전 가족 마라톤 아이디어는 지난해 10월쯤 아버지가 처음 제안했다. 아이들은 선선히 OK, 아내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해프 2번도 힘들었는데-”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내는 3년 전 해프 마라톤을 처음 뛰고 나서 16시간을 잤다고 한다.
딸은 2년 전 아버지와 캐나다 밴프에서 열린 해프 마라톤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아들과는 오클랜드 마라톤을 같이 뛴 적이 있으나 철인 삼종부터 시작해 지금은 산악 마라톤도 하고 있는 아버지를 제외하면 이들 가족을 마라톤 매니아라고 하기는 어렵다.
가족 마라톤을 생각한 것은 가족이 함께 힘든 일에 도전하는 공동의 추억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힘든 일을 함께 해냈다는 뿌듯한 자부심과 끈끈한 연대감을 기억으로 갖고 싶었다고 아버지는 말한다. LA마라톤을 택한 건 볼 거리, 즐길 거리가 많은 큰 대회였기 때문이다.
가족 마라톤 이야기가 나온 뒤 아이들은 시애틀에서 자기들끼리 만나 연습하는 것 같았다. 연습은 아내가 가장 열심히 했다. “애들 보는 눈도 있을 테니까 평소에는 자주 빼먹던 클럽 훈련에도 부지런히 참석하더라”고 남편은 귀띔했다.
이같은 연습 덕에 대회 당일 아내와 딸은 6시간 대에 들어왔다. 아들과 몸이 좋지 않아 뛸 형편이 아니었던 아들의 여자친구는 그보다 한 시간여 뒤 들어왔다. 3시간25분의 기록을 갖고 있는 아버지는 앞뒤로 오가며 가족들의 완주를 격려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속해 있는 한인 마라톤클럽 KART의 피터 김 코치가 끝까지 뒤에 처진 아들 조의 페이스를 맞춰주며 완주를 이끌었다고 아버지는 감사해한다.
마라톤 인구가 늘고 있지만 마라톤에 도전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 정도라고 한다. 마라톤을 하려면 우선 부지런해야 한다. 주말 늦잠은 포기해야 한다. 새벽 4시~4시반부터 뛰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게으르던 사람도 마라톤을 하면 부지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완주하면 해냈다는 성취감, 자존감이 높다. 기록경기여서 도전의 여지는 늘 있다. 알게 모르게 닥쳐오는 부상이 문제지만 요즘은 무턱대고 뛰지 않는다. 부상 방지를 위해 클럽마다 체계적인 훈련을 하면서 근력강화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한다.
리처드 이씨 네는 식구끼리 여행이 많았다. 작년에는 대학을 졸업한 딸과 엄마 단 둘이 스페인의 순례길 산티아고 길을 보름 정도 걸었다. 처음에는 호텔에 묵는 관광을 생각했으나 고생이 되더라도 걷는 쪽으로 일정을 바꿨다. 다녀오고 나니 남는 것이 더 많은 유익한 여행이었다. 4년 전에는 대학생 아들과 아버지 두 사람이 한 달간 남미 여행을 했다. 유스 호스텔에 묵으며 배낭여행을 하고, 4박5일 잉카 트레일도 했다. 부모 자식 사이에 할 말이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부러운 가족이다.
LA다운타운에서 기프트용품 도매를 하는 그는 사업체에 불이 나서 비즈니스를 왕창 날리는 시련을 겪은 적이 있다. 마침 화재보험도 없었다. 차 팔고, 집안의 금붙이까지 다 팔아 재기에 나서야 했다. 아이들이 중고교 시절, 한창 사춘기 때였다. 하루 밤에 모든 것을 잃고 나니 남는 것은 아이들, 가족밖에 없었다고 한다.
리처드, 조앤 이 씨 부부와 아들 형석과 딸 푸름은 이번 마라톤을 통해 다른 여러 LA마라톤 참가 가족들처럼 식구들끼리만 공유가능한 귀중한 추억 하나를 더했다. “친구들 하고 노는 게 더 재미있을 텐데 휴가를 얻어 내려와 시간을 나눠준 아이들이 고맙다.”는 아버지는 가족의 첫 마라톤 도전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었다.
“…우리는 신나는 고생길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땅에 살다가 언젠가 힘들어 무너지려할 때 이날을 꼭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이겨낸다면 결승점에는 박수와 메달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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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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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본받을만한 가족입니다. 뛸때는 죽을 맛이지만 완주 후에 닥쳐오는 성취감과 후련함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지요. 인생살이의 축소판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