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은 유명한 관광지나 번잡한 도시보다는 한적한 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작은 소도시를 검색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첫 여행지로 낯선 몰타를, 아내는 여러 번 여행했던 로마를 최종 목적지로 정했고, 나는 로마 근교의 소도시를 끼워 넣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설레는 도전은 시작되었다.
몰타에서 넉넉한 며칠을 보내고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짐을 던져놓고 거리로 나섰다. 세월의 무게를 품은 중세의 도시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길에서 마주치는, 지구 반대편에서 걸어온 이방인들도 반가웠다.
로마의 겨울이 추울 거라는 생각도 섣부른 선입견이었다. 덧입은 얇은 점퍼가 거추장스러울 즈음, 오후에 잠시 비가 내렸으나 사람들은 비를 피하느라 서둘지 않았다. 오히려 비는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타임캡슐 같았다. 묵직한 하늘을 이고 천천히 걷는 사람들을 보며 중세의 암흑시대를 떠올렸고,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2000년의 문이 마법같이 열렸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나뉘어 졌다는 티베르 강가를 걸었고, 2000년 전의 그와 2000년 후의 내가 함께 다리를 건너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속에 들어와 있었고, 어느새 로마인이 되어 있었다. 목적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걸으며 오래전에 여유가 없어 지나쳐 간 모든 풍경을 다시 기억에 저장했다. 관광객들이 모이는 몇 곳쯤은 굳이 다시 보지 않아도 충분했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갑자기 떠올린 건 로마 중앙역에 도착해서 였다. 아씨시(ASSISI) 로 가기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던 우리는 커피 한잔의 여유를 부리다 하마터면 기차를 놓칠 뻔했다. 테르미니역(Stazione di Roma Termini)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출구를 빠져 나가면 기차를 탈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역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기다리는 아씨시행 기차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면서도 서로 마주보고 크게 웃었다.
낯선 외국에서 기차를 타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며 책을 읽고 있다는 어느 여류 작가의 고백을 들으며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 꿈은 낯설음에 대한 동경이었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작가의 독백에서처럼 낯설었지만, 그 낯설음은 이내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아득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외할머니의 집과 작은 마당이 보였고. 이른 새벽에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새 냉골이 되어버린 방에 불을 지피는 주름 가득한 외할머니의 얼굴이 창으로 스쳐갔다. 나만 보면 흐뭇하게 웃으시던 외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보고 싶다’라고 유리창에 적었다. 마음이 더 없이 평화로워졌다. 사물을 천천히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잔상으로 남아있는 풍경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음을 알겠다. 지극히 사소한 것에 눈길이 머물고, 그 눈길이 닿는 곳마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까지 참 먼 길을 달려왔다.
아씨시는 소박하고 작은 역이었다. 마을로 올라가기 위해 간이역 구석에 있는 편의점에서 버스표를 샀고, 그제야 많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한 무리의 한국인 여행객을 발견했다. 버스는 산허리를 돌아 올라가 큰 광장에 사람들을 내려놓았고, 그 광장 끝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었고, 그 먼 곳에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으로 여겨졌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앞뒤에 앉은 낯선 이들에게도 진심으로 평화를 빌었다.
소박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성당의 내부는 그동안 보아왔던 유럽의 화려한 성당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간결하고 검소하기조차 한 성전은 수도원을 떠올리게 했고,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성인의 무덤이라는 지하의 돌기둥 아래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기원하며 함께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성인을 흠모하며 마음에 담은 청년 시절의 내가 있었고, 닮고자 했으나 내가 만들어 놓은 길을 가느라 외면했던 어두운 시간이 보였다. 어쩌면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의지하고 싶었던 성인께 가난한 무릎을 꿇고 싶어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성당 문을 나서려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고 급히 빠져 나가는 그들을 보며 어쩌면 삶은 ‘찰나를 기록한 기념사진’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 첨탑 너머로 해가 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를 오래 기억하기로 한다.
“사는 일이 그냥/ 숨 쉬는 일이라는/ 이 낡은/ 생각의 驛舍에/ 방금 도착했다”
‘여행에 대한 짧은 보고서’ 라는 여행 중에 읽은 이화은 시인의 짧은 시가 기억에 남는다. 익숙함을 벗어나 낯설음에 도전하는 여행, 오늘,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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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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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늘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자세는 참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