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조성진이라는 피아니스트가 쇼팽 콩쿨에서 우승한 바 있었는데 5회 연속 우승자가 없다가 우승했으므로 그 영광이 배가되어 국가적으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그 당시의 쇼팽 콩쿨이 말해주듯 쇼팽 연주는 그리 만만한 것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쇼팽의 음악이야말로 화려한 테크닉만으로는 어딘가 메마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쇼팽의 음악은 워낙 유명하여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명연주를 들려주고 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쇼팽의 음악만이 주는 자유로움이라고나할까, 건반과 함께 호흡하며 노래하듯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옥 구르듯 물이 흐르듯 하는 연주, 즉 쇼팽만의 시적인 연주가 힘들다는 것이다. 지난 번 ‘베스트 라흐마니노프’에서 소개했던 스비아토슬라프 리이터가 들려주는 쇼팽은 너무 막장이었다. 그것은 마치 쇼팽의 곡을 베토벤의 곡처럼 친다는 것인데 그렇다고해서 크게 잘못될 것은 없지만 베토벤 곡이라면 몰라도 쇼팽의 곡에서 만큼은 너무 개성 넘치고 사나운 느낌은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딘가 조성진처럼 시적인 감성에다가 대가의 느낌도 함께 들려주는 연주는 없을까? 있다면 아마도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 1903- 1991)의 연주를 꼽지 않을 수 없을지 모르겠다.
당신은 쇼팽을 좋아하십니까? 쇼팽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실 쇼팽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피아노의 시인입니다’ 하고 대답할 수 도 있겠지만 ‘음악에서 시인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이 또한 대답이 궁할 수 밖에 없다. ‘쇼팽의 음악이 서정적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도 서정적인 음악을 많이 썼는데 왜 하필 쇼팽에게만 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였느냐 묻는다면 이 또한 대답이 쉽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쇼팽이라는 인물을 딱히 설명할 마땅한 말이 없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지도 모르지만 사실 쇼팽만큼 독립적으로 활동한 작곡가도 드물었다. 즉 베토벤이나 브람스처럼 독일 낭만파의 계보을 이어받았다든지 어떤 이름있는 스승 밑에서 공부한 작곡가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슈만이나 멘델스존 등과 동시대에 속했으면서도 동시대의 형식에 준하는 음악을 선호하지도 않았고, 또 예술성을 크게 염두에 두고 피아노를 치거나 작곡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쇼팽 자신은 자신의 음악을 카페에서나 연주하면 딱 알맞는 음악이라고 폄하했다.
사실 쇼팽의 음악을 듣다보면 수려하고 감성에 깊이 와 닿는 선율미는 일품이지만 어딘가 클래식이 아니래도 느낄 수 있는 쎄미 클래식 혹은 팝송을 듣는 듯한 느낌을 떨어버릴 수 없을 때가 많다. 즉 쇼팽의 음악에는 클래식이 주는 형식주의, 또 형식주의가 주는 절제 속에서의 어떤 정신적인 극기같은 것은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남들은 모두 잠들어 있을 때 홀로 깨어 무언가를 공상하거나 낙서를 끄적거라고 있다든지 모두가 공부에 심취해 있을 때 식물도감이나 꽃 향기에 심취해 있는 그런 한눈파는 느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기성화시키는 그런 속물적인 감각에서 벗어나 쇼팽의 음악을 통해 시적 감각을 영감받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런의미에서 쇼팽의 음악이야말로 가장 자유롭고 어쩌면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outstanding’한 음악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연주야말로 청중과 쇼팽 사이의 꿈을 접목시키는 가장 이상적인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하겠다. 특히 그의 연주에는 막힘이 없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음색 또한 탁월하니 금상첨화, 여지껏 수많은 쇼팽 연주를 들어왔지만 아라우가 연주하는 쇼팽의 스케르초 혹은 피아노 협주곡만큼 아름다운 곡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라우는 PHILIP 레코드 社 등과 함께 쇼팽의 모든 작품 그리고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 등을 녹음하기도 했는데 특히 쇼팽 연주에서 가장 압권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1903년, 칠레의 칠란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음악 교사였던 어머니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안과의사였던 아버지는 아라우가 태어나자마자 승마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세 무렵 베토벤의 소나타를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암보로 연주했다고 하며, 5세 때 리사이틀을 열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칠레 정부의 원조로 1911년에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옮겨 리스트의 제자였던 마르틴 크라우제에게 사사했으며11세 때 베를린에서 데뷰, 명성이 높아진 뒤로 멩겔베르크, 프르트벵글러 등과 협연하며 이름을 높였고 88세에 사망할 때 까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거장의 한명으로서 수많은 명연주들을 남겼다.
<이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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