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호주 시드니를 노부부 둘이서 같이 다녀왔다. 사모님이 홈쇼핑을 보다가 두 달 전 발견한 기획상품에 끌린 것이다. 워낙 저렴한 가격으로 추운 겨울 날씨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냥 질렀다. 왕복 비행기 요금 수준에 4박6일 동안 먹고 자고 노는 것을 모두 해결해준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문제는 호주에 산불, 그것도 대형산불이 난 것이다. 아무리 외국이어도 재난지역에 관광여행을 간다는 것은 찜찜한 일이다. 또 가봐야 얼마나 즐길 수 있겠는가. 가지 않으면 페널티도 내야 한다. 복잡한 계산 끝에 그냥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시드니에 도착하니 가는 곳마다 연기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미세먼지에 비하면 그렇게 험악한 상황은 아니라고 느꼈지만 그래도 매캐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묵었던 호텔 근처에서 꽤 냄새가 나길래 직원에게 “불이 여기서 얼마나 먼 곳에 났느냐”고 물었더니 “차로 약 20분 정도 거리입니다. 당국에서 별문제가 없다고 하니 안심하세요.”라며 태연하게 말한다. 로비에서는 연신 신나는 록 뮤직이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12월31일 밤12시 시드니 항구에서는 세계 최대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시드니 당국도 국가 재난사태에 이런 축하행사를 하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이 됐던지 그 전날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결국 수많은 외국관광객이 이것을 보려고 와 있는 상황에서 취소한다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강행한다.
인간이 즐기는 것을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문제는 코알라다. 동물원에 가서 코알라와 사진도 찍었다. 무척 귀엽게 생기고 순한 동물이다. 하루 24시간 중 23시간을 잔다고 할 정도로 잠보다. 행동도 느릿느릿하다. 독성이 있는 유칼립투스 잎을 주식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귀엽기 짝이 없는 코알라가 멸종위기를 탈출하기는커녕 이번 산불로 엄청난 피해를 봤다. 불이 나면 코알라가 나무에서 내려와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면 좋을 텐데 그냥 그 불붙은 나무 위로만 올라간다. 결국 다 죽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상시 사람들은 평소에 하던 대로 할까. 사람들은 비상시에도 평소 하던 대로 한다. 9·11사태 때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하루 안에 죽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서도 거의 모든 직원이 살아남은 회사가 있었다. 모건스탠리다. 이 회사가 남달랐던 것은 한 안전팀장의 프로페셔널리즘 덕분이었다. 릭 레스콜라는 평소 안전대피 훈련을 실전처럼 했다. 건물이 비행기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이자 사람들이 불안해할 때 다 같이 노래를 부르라고 지시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같이 행동할 것이 필요하다.
평소 내방객이 회사에 오면 제일 먼저 비상탈출구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실하게 보여줬다. 결국 그날 모든 직원과 고객을 대피시키고 난 뒤 4명의 안전요원을 구하러 다시 빌딩으로 들어가 구조에 성공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건물과 함께 사라진다.
타조가 사막에서 응급상황에 처하면 모래를 파고 고개를 파묻는다고 한다. 자기가 남을 못 보면 남도 자기를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달리할 뾰족한 길이 없는데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에서 하는 행동일까. 9·11사태에서 전원 죽음을 당했던 대다수의 회사에서는 어떤 풍경이 벌어졌을까. 그냥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서 서로 걱정만 하고 있다가 다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사람은 비상시에도 평소처럼 행동한다.
여행 가이드가 해준 말이 문득 생각난다. 호주에서는 3P를 늘 강조한단다. PREVENTION(예방), PREPARATION(준비), PRACTICE(훈련)다. 여러분의 조직은 비상사태에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가.
타조처럼 그저 머리를 모래에 파묻고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코알라처럼 불타는 나무 위로 올라가고 있는 중은 아닌가. 최악의 사태를 시뮬레이션하고, 수단을 강구하고, 끊임없이 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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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 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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