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검하수? 병원으로 달리는 차내에서 백미러로 슬쩍 비춰보니 왼쪽 눈꺼풀이 밑으로 많이 쳐졌다. 1년 동안 슬금슬금 불은 8파운드의 살을 불과 4일만에 60시간 단식으로 갑자기 뺀 부작용으로 눈이 많이 부은 것이었다.
며칠 전 4년 만에 고국에 열흘간 다녀온 뒤 시차문제로 그렇지 않아도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검사 스케줄 착각으로 처방된 액상 하제만 마시며 하는 단식을 뜻하지 않게 2회나 했더니 부작용 탓에 어제는 머리가 뽀개지는 듯 아팠었다. 책상에서 쓰러져 이대로 세상을 하직하는 거 아닌가 하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점심도 안 먹고 조퇴해서 근 30년 만에 깊은 낮잠을 푸욱 자고 나서야 가까스로 컨디션을 회복했다.
그리고는 쿠퍼티노 스페이스십 애플 본사 옆에 멋지게 새로 지은 초현대식 카이저 병원으로 위장 대장 더블 내시경 검사를 하러 갔다. 시술 후 마취가 덜 깬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운전자로 이곳 실리콘 밸리에서 만난 상해 출신 중국인 누이 리안을 태우고 갔다.
그녀는 나의 절친 형님인 덴마크계 미국인 스티브의 부인으로 중국인 특유의 침착함과 대국의 풍모가 몸에 배어 있는, 한마디로 마음이 정말 따뜻한 여인이다. 약 30년 전 결혼한 이 부부는 팔로알토 부근의 한 샤핑몰에서 스티브가 20대 초반이던 1974년 창업한 그로서리 마켓을 45년간 운영하다가 샤핑몰 재개발 건축주로부터 거듭 좋은 오퍼를 받고 팔면서 대박을 터트렸다.
리안 누이는 병원 체크인 때 말했던 내 생일을 기억했는지 내년 초 60세 생일이 되면 디너를 멋지게 차려주겠다고 한다. 혼자인 내게는 스티브 부부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 모른다. 사업은 잘되는지, 러브 라이프에 진척은 좀 있는지 이것저것 내밀한 사정을 진심으로 살펴주는 그들은 이역만리 미국에서 친형제 못지않은 참으로 따뜻한 가족이다.
추수감사절 연휴를 앞두고 조카가 부산에서 38세로 늦장가를 간다는 청첩을 받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새로 알게 된 VIP 고객과의 딜을 잠시 미뤄 놓고 한국으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주저하던 나를 단호하게 공항으로 밀어준 것은 10년 전 타계한 형님을 대신해서 내가 조카의 결혼식 자리에 서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사명감이었다.
14시간의 갈아타는 비행 끝에 부산 김해 국제공항에 도착한 후 홀로 사는 66세의 큰 누이네 아파트에서 하루를 잘 쉬고 다음날 부산 벡스코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예고 없이 나타난 나를 보고 새신랑 조카와 약 40년 전 우리집으로 시집온 누이인 큰 형수는 얼마나 놀라며 기뻐하던지… 그간의 서먹했던 감정들이 한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몇 십년 만에 만난 친척들과의 해후는 그리운 혈육에 대한 나의 오랜 갈증을 풀어주었다. 예식 후 우리는 인근의 해운대 신시가에 자리한 작은누이의 딸네 아파트에 들러서 진해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하신 구순 가까운 고모님과 고종 사촌동생 그리고 누이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터지는 웃음보 속에 적조했던 저간의 회포가 풀렸다.
여고 일진(?) 출신인 작은 누이가 종횡무진 배꼽 잡는 왈가닥 무용담 보따리를 풀어놓을 때 큰 누이가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에 나는 그만 가슴이 먹먹해 졌다. “쟤처럼 악바리였으면 등록금 제때 못내는 게 부끄러워 여고를 자퇴하지는 않았을 텐데…”
선친은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일본 소학교 교사를 하시다 24세 때 해방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정착하셨다. 이때 시작한 사업이 한 20년간 잘 되다 64년경 실패하는 바람에 큰 누이는 최고급 주택가에서 자가용에 태워져 공주처럼 자라다 서울의 변두리로 이사를 와 극심한 환경변화로 충격을 받았다. 이후 고운 꿈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초로의 나이가 된, 그림을 잘 그리던 큰 누이의 일생을 생각하면 나는 마음이 아프다.
아울러, 오랜만에 귀국한 나를 위해 서울에서 바리바리 선물을 갖고 달려와 진심 어린 환영의 손을 잡아준 초딩 동창 여친들, 정동에서 환영 막걸리 파티를 열어준 두세살 터울의 살가운 외사촌 여동생들… 모두모두 그렇게 정겨울 수 없는 나의 누이들이다.
누이들아, 지구촌 어디에 살든지 나의 정다운 누이들이 되어 줘서 고마워. 우리 모두 여울진 추억이 은모래 되어 반짝이는 강변 살자. 밝아올 2020 경자년 쥐띠 새해, 누이들 모두 더욱 행복하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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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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