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나치는 인류역사의 대 죄인이지만 딱 한 가지 미국에 좋은 일을 한 게 있다. 1940년대 초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수많은 유럽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의 상당수가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 문화가 풍성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도운 일이다.
나치의 ‘퇴폐미술’ 블랙리스트에 오른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술가들이 독일을 떠났을 때 미국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뒤샹, 샤갈, 몬드리안, 레제, 에른스트와 페기 구겐하임 등이다. 이런 거장들이 뉴욕 화단에 자리 잡으면서 추상표현주의가 형성됐고, 그 결과 2차대전 이후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대건축의 기초를 놓은 건축예술학교 ‘바우하우스’가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폐교됐을 때도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독일을 떠나 영국, 스위스, 미국 등으로 흩어졌다. 이중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보스턴의 하버드 건축학과장이 되었고, 라슬로 모홀리 나지와 미스 반데어로에는 시카고에 정착해 유명 디자인 스쿨과 건축학교의 수장이 되었다.
문학계에서는 독일 지성의 대변인이며 작가인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형제가 미국으로 건너와 캘리포니아에서 살았고, 미국시민으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여러 분야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천재들이 많이 영입된 분야는 클래시컬 음악계다. 세계대전뿐 아니라 러시아혁명을 피해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한 음악가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미국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지금은 전설이 된 20세기의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창작 산실이 되었다.
작곡가로는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라흐마니노프, 바르톡, 쳄린스키, 코른골트, 힌데미스, 쿠르트 바일이 있고, 지휘자 브루노 발터,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등이 20세기 초 미국에서 활동한 유럽과 러시아 출신 음악가들이다. 이들은 주요 교향악단에서 지휘자와 악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오케스트라 수준이 급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또한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며 실력있는 차세대 연주자들을 길러냄으로써 미국의 음악 산업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지난 주 누미 오페라(Numi Opera)가 에리히 코른골트의 오페라 ‘폴리크라테스의 반지’(Der Ring des Polykrates)를 지퍼홀에서 공연했다. 올해 창립된 누미 오페라는 나치 때문에 사장된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을 발굴하고 소개하기 위한 단체로, 지난 5월 쳄린스키의 오페라 ‘난쟁이’(Der Zwerg)를 초연했고, 이번에 두 번째로 코른골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작곡가들인 코른골트와 쳄린스키는 미국으로 망명해 각각 LA와 뉴욕에서 살았다. 같은 시기 오스트리아에서 온 쇤베르크가 UCLA와 USC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크게 환영받았던 것과는 달리 코른골트와 쳄린스키는 거의 인정받지 못한 채 주옥같은 작품들도 잊히고 말았다.
특히 코른골트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있다.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9세때 쓴 칸타타와 발레음악을 보고 말러와 슈트라우스가 천재라고 감탄했고, 15세때 쓴 신포니에타를 들은 시벨리우스는 ‘우리들의 미래’라며 극찬했던 작곡가다.
그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후 영화음악에 헌신하여 ‘앤소니 애드버스’(1936)와 ‘로빈 후드의 모험’(1936)으로 오스카상을 2차례 수상하는 등 크게 성공했는데 바로 그 때문에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외면당했다. 할리웃 영화음악의 판도를 바꿔놓은 최고의 영화작곡가로 인정받았으나 그보다는 클래식 작곡가로 인정받고 싶었던 코른골트는 전쟁이 끝나자 유럽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새 유럽 음악계는 실험적인 현대음악 중심으로 바뀌어있었고, 그는 대중음악가로 치부되면서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실망하여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LA에서 1957년 세상을 떠났다.
‘폴리크라테스의 반지’는 세트와 무대 없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됐다. 코른골트가 17세때 썼다는 1막짜리 코믹 오페라의 수준은 경이롭고 매혹적이었다. 오케스트레이션과 인물들의 표현이 아주 잘 개발돼있었고 가수들과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훌륭했다. 이런 잊혀진 음악들이 더 많이 발굴되고 연주되어야겠다.
역사가 일천한 미국의 문화는 외국에서 망명한 예술가들의 공로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용계도 조지 발란신,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알렉산더 고두노프 등의 활약으로 미국의 발레 수준이 크게 향상됐다. 이런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미국의 문화는 지금처럼 화려하고 다양하지 못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새겨들었으면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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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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