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백조의 호수’다. 짧은 튀튀를 입고 머리에 깃털을 붙인 발레리나들이 우아하게 춤추는 모습은 그대로 발레의 이미지가 되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인 ‘백조의 호수’는 1877년 볼쇼이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세상의 모든 발레단이 가장 자주 공연하는 작품이고, 모든 발레리나는 오데트와 오딜이 되어 무대에 서기를 꿈꾼다.
그 전통적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고 무용계에 혁명을 일으킨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Matthew Bourne’s ‘Swan Lake’)가 지난주부터 LA 뮤직센터 아만슨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백조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고, 주인공은 공주가 아니라 왕자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날갯짓을 하는 여자백조들 대신 웃통 벗고 깃털바지를 입은 남자백조들이 아드레날린 넘치는 파워풀한 군무를 펼친다. 게다가 이 백조 떼는 착하고 순수하기는커녕 위협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종국에는 두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 혁신적인 프로덕션이 1995년 런던에서 초연됐을 때 관객들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공연 도중 많은 사람이 나가버렸다. 백조가 남자라니, 왕자와 남자백조가 사랑을 한다니,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런 생각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선하고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열광한 관객들은 발을 구르며 폭발적 반응을 보냈고, 그렇게 파란을 일으키며 세계적으로 히트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초연 당시 화제가 됐던 또 하나의 이슈는 현대 영국의 왕실을 풍자한 무대였다. 기가 센 여왕 밑에서 주눅 들어 살던 유약한 왕자가 강인하고 자유스러우며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백조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황실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만했다. 더구나 오리지널 프로덕션에서 왕자 역을 맡은 스캇 앰블러는 찰스 황태자를 빼다 박은 외모였으니 당시 찰스와 다이애나, 사라 퍼거슨, 마거릿 공주의 스캔들이 연일 터져 나오던 터에 구체제의 전통에 식상한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낸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우려와는 달리 왕실 스캔들 이슈는 남자백조들의 힘찬 비상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만큼 무서운 백조 떼의 습격이 극 전체를 강렬하게 지배하는 것이다. 이 남자백조의 설정에 대해 매튜 본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본 백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백조는 우리가 생각하듯 우아하기만 한 새가 아니라 상당히 강하고 공격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백조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백조들의 비디오를 수없이 보면서 안무했다는 그는 여기에다 위트와 블랙유머를 가미해 흡인력 강한 무대를 창조해냈다.
현대 무용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안무가로 꼽히는 매튜 본은 ‘백조의 호수’ 이후 고전의 틀 속에 갇혀있던 발레를 21세기 현대인의 몸짓으로, 동화 속 세계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현실세계로 탈바꿈시켜왔다. 그의 무용단 ‘뉴 어드벤처’와 함께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호두까기 인형’ 등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음악 작품을 모두 재해석했고 ‘신데렐라’ ‘분홍신’ ‘가위손’ ‘카 맨’ 등 드라마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을 ‘댄스뮤지컬’로 재창조함으로써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작품들로 갈채 받고 있다.
LA뮤직센터의 센터시어터그룹(CTG)은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1997년 미국초연했고 2006년 재 초청했으니 이번이 세 번째다. 매튜 본의 다른 작품들로 2017년 ‘레드 슈즈’를, 올해 초 ‘신데렐라’를 공연했는데 이들도 대단했지만 그래도 역시 그의 최고작은 ‘백조의 호수’다.
처음 ‘백조의 호수’를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어두움, 다크니스였다. 그 안에 외로움과 우울과 갈망을 가득 담은 어둠의 파워는 다른 어떤 발레 공연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을 코미디와 한데 버무린 독특한 다크 유머, 그리고 점차 스토리가 고조되어 파국에 이르는 운명적 비극의 장렬함에 한참동안 가슴이 뛰었던 생각이 난다.
오랜만에 본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여전히 놀랍고 대단했다. 두시간 동안 감상자의 시선을 빈틈없이 장악하는 드라마, 강렬하고 호소력 짙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라이브 연주가 아닌 점이 아쉽다), 고전발레와 팝 댄스를 뒤섞은 역동적인 안무….
이번 무대는 매튜 본이 2014년 안무와 조명에 살짝 변화를 준 프로덕션이다. 또 오리지널 무대에서 지울 수 없는 명연을 펼친 아담 쿠퍼를 잇는 새 세대의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극장에서 처음 본 춤 공연이 바로 이 작품이었고, 영화 ‘빌리 엘리엇’을 보면서 발레리노의 꿈을 키워온 젊은이들이다. 이 영화 맨 마지막에 아담 쿠퍼가 백조로 비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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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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