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목포 신안
1,004여개 섬이 산재한 다도해, 천사대교 연결 자은도 등 뭍으로 노을빛 어우러져 천국 본듯 탄성
▶ 암태도선 기발한 벽화가 방긋, 안좌도엔 김환기 화백 숨결이
한국 미술이 추상화단으로 진입하는 문을 연 고 김환기 화백의 고택. 김환기는 신안군 안좌도 태생이다.
암태도 기동삼거리에 있는 문병일·손석심 부부의 담벼락. 노부부의 얼굴과 담장 안에 심어진 동백나무의 컬래버가 압권이다.
천사대교를 건너면서 바라본 서해의 해넘이.
천사대교를 건너와 오른편으로 꺾어지면 나오는 오도항에서 바라본 다리의 모습.
일몰에 맞춰 전라남도 목포에서 출발해 천사대교로 향했다. 다리를 건너는 도중 해는 뉘엿뉘엿 서편으로 기울었다. 미리 통화했던 서상현 문화관광해설사가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오도항(港)이라는 작은 포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보는 천사대교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내비게이션을 찍었더니 오도항이 검색되지는 않았다.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도착한 오도항에는 관광버스 석 대에서 쏟아져 나온 나들이객들이 새로 놓은 다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천사대교는 이미 목포와 연결된 압해도를 암태도와 연결하면서 자은도·팔금도·안좌도를 뭍으로 만들어놓았다. 천사대교라는 다리 이름은 신안군에 산재한 섬의 숫자가 1,004개인 것에서 유래했다는데 실제로 관내 섬들의 숫자가 1,004개인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적게는 800개라는 설도 있고 1,200개가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안군에는 작고 이름 없는 무인도가 많아 어느 것을 섬으로 간주해야 할지 명확지 않기 때문이다.
◇육지가 된 암태도= 어쨌거나 천사대교 개통 이후 다리와 연결된 섬들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상현 해설사는 “지난 4월 총연장 10.8㎞에 달하는 천사대교가 개통되자 섬을 구경하려는 행락객들이 몰리면서 교통체증이 목포 시내까지 이어지기도 했다”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진정된 상태”라고 전했다. 천사대교를 구경한 기자는 다시 차를 서북쪽으로 몰았다. 아무래도 전망이 트인 서북단의 자은도로 가야 노을빛이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닷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는 완전히 떨어지고 사방에 어둠이 내렸다. 어두워진 섬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다시 육지로 나와 하룻밤을 묵고 섬으로 들어갔다.
이른 새벽 암태도에 진입해 기동삼거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 순간, 어젯밤에는 어두워서 눈에 띄지 않았던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담장 안에 있는 동백나무를 머리카락 삼아 벽에 그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신기해서 다가가 보니 대문 옆의 문패에는 ‘문병일 손석심’이라고 적힌 문패가 걸려 있다.
마당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흔들어 주인을 찾았더니 담벼락에서 웃는 얼굴로 기자를 바라보던 바로 그 할머니가 방 안에서 나왔다. 이 집의 안주인 손석심 할머니다.
손 할머니께 그림에 얽힌 사연을 물었더니 할머니는 “면사무소에서 담장에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졸라대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나중에야 허락했다”며 “허락한 후 화가가 와서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어가더니 그걸 보고 담벼락에 그림을 그려놓았다”고 말했다.
손 할머니는 “그림을 그려놓은 다음부터 관광객들이 무시로 대문을 밀고 들어와 나를 찾고 ‘사진을 함께 찍자’고 조른다”고 했다. 손 할머니는 “처음에는 내 모습만 그렸다가 나중에 비슷한 크기의 동백나무 한 그루를 더 사와 심은 다음 담벼락에 할아버지 얼굴까지 그려놓았다”고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섬이 예술인 이유=암태도 남쪽 안좌도로 내려가면 한국이 낳은 거장 고 김환기 화백의 생가터에 다다른다. 김환기 화백은 현대 미술작가 가운데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화가 중 한 명으로, 이는 그의 선구적 추상성이 대중성을 겸비했음을 입증한다. 1913년 안좌도에서 출생한 그는 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숲을 보며 자랐고, 이 같은 자연환경은 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를 이을 손자의 생산을 간절히 원했던 부친의 뜻에 따라 일찍 결혼했던 김환기는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자 곧바로 이혼했고, 폐병으로 죽은 천재 시인 이상의 처 변동림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변동림은 김환기에게 “사랑의 표시로 당신의 이름을 달라”고 제안한 후 성을 김씨로 바꾸고 김환기의 아호 향안을 자기의 이름으로 삼아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했다. 두 사람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4년 결혼했다. 김향안은 프랑스 소르본으로 가 미술비평을 공부한 후 김환기를 불러 작품활동을 함께하며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다.
두 사람의 예술적 교감은 그가 고국을 떠나 뉴욕에 정착한 지 7년 만인 1970년, 200호짜리 대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으로 발현된다.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김광섭(金珖燮)의 시 제목이기도 한 작품을 보고 한국 화단은 충격에 휩싸였다. 김환기 작품의 모티브였던 산·달·구름·새·항아리 등의 형상들 대신 점들의 집합일 뿐인 추상화 한 점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화폭 뒷면에는 그림의 제목이자 김광섭의 시(詩)인 ‘저녁에’가 적혀 있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글·사진(신안)=우현석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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