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스무 번째 맞은 추수감사절이었다. 3주간의 출장으로 쌓인 여독을 다 풀지 못해 올해는 조용히 휴식하는 감사절을 보내기로 했다. 아침식사를 한 후 남편은 18홀을 치려면 10시 전에 티오프를 해야 한다며 서둘러 골프를 치러 나섰다.
서두름, 그게 화근이었다. 그가 바삐 차고와 집안을 드나들 때 우리 집 검은고양이 슈리가 차고에 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차고 문을 열자 슈리가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그이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비상이야, 비상! 슈리가 집밖으로 나갔어! 빨리 나가서 잡아!”
아침상을 정리하다 말고 나는 맨발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황급히 나를 확인하고 차를 타고 떠나갔다. 슈리는 벌써 집 바로 옆 화단에서 더 먼 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수용소를 탈출한 빠삐용처럼 더 멀리 달아나려 한다. 유난히 바람이 거세 바람 주의보가 내린 아침에 세차게 흩날리는 낙엽에 놀라 슈리는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쫓는 것을 포기하고 들어와 나는 작은 아이의 도움을 청하려 바삐 2층으로 올라가 잠긴 방문을 두드린다. “얘, 슈리가 나갔어!” 커다란 음악소리가 새어 나오고 방문이 잠긴 걸 보니 아이는 샤워 중이다.
나는 장기전에 대비하려 두터운 외투를 챙겨 입고 신발도 제대로 신고 다시 나선다. 슈리는 이웃집 화단의 햇살 잘 드는 곳에 드러누워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내가 조심조심 잡으러 다가가니 후다닥 내달려 수풀 안으로 도망간다.
이 배은망덕한 고양이가 추수감사절 아침에 내게 이런 고초를 주다니! 속에서 화가 성난 바람처럼 인다. 바람에 머리는 산발이 되어 미친 여자처럼 이쪽저쪽으로 뛰어다니다 전략을 바꾸기로 한다. 이 고양이를 입양한 고양이 주인이자, 이번 학기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나가 있느라 고양이를 내게 맡기고 추수감사절에도 돌아오지 못한 큰애가 언젠가 말했었다. 집밖에 나가도 영리해서 집을 찾아오니까 앞문만 열어두면 알아서 돌아온다고.
현관문을 비스듬히 열어놓고 문 안쪽 기둥에 기대어 앉는다. 지난주 한국에서 사온 승효상 건축가의 <묵상>을 읽으며 기다린다. 온갖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동네에 돌아다니던 여우한테 물려가진 않을까. 오가는 차에 치이진 않을까. 이런 사태를 만들어놓고 골프 치러간 남편은 정말 18홀을 다 치고 올까. 애들 어릴 때도 주말이면 골프 치러나가 그렇게 싸웠었는데….
이곳에 앉아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슈리도 남편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날로 남편을 떠날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길어지려 할 때, 나는 그 꼬리를 자르고 기도한다.
“추수감사절입니다. 저는 예상치 못한 일로 평온을 잃고 감사한 많은 것들을 스스로 파괴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화평을 깨려는 사탄의 잔꾀에 넘어가지 말게 하시고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고 때에 따라 추수의 기쁨을 주시는 당신께 이 모든 것을 맡기게 하소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작은 아이가 밖에 나가 슈리를 쫓아다니며 간간이 들어와 내게 보고를 한다. “엄마! 보세요! 엄마 화단에 엄마가 좋아하는 빨간 새, 카디널이 왔어요!”
문밖에 나서보니 카디널이 앞 화단에 놓인 벤치 위에 앉아있다. ‘추수감사절 인사를 하러 왔나?’ 추운 날씨에 젖은 머리를 하고 나가 있는 아이에게 슈리는 알아서 돌아올 테니 들어와 있으라 해도 지금은 뒷마당 뒤편의 이웃집 헛간 밑에 있다는 보고를 하고는 또다시 뛰어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소리가 들린다. “골프 다 치고 오면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아 돌아왔어. 아직도 밖에 있어?” 남편은 뒷마당에 서있는 아이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대신 나선다.
얼마나 지났을까. 슈리가 열린 문으로 머리를 쓰윽 내밀고는 들어선다. 마른 풀 몇 조각을 검은 털에 붙인 채. 나는 잽싸게 현관문을 닫고는 마치 횡재를 한 듯 소리쳤다. “슈리가 집에 왔다!” 둘째는 방에서 달려 나오며 “Oh, What a day to be thankful!(오, 얼마나 감사한 날인지!)”하고 외친다.
뒷마당에서 들어오며 남편은 말한다. “점심은 내가 맛있게 짜구리 해줄까?”
언제나 감사할 무언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할 추수감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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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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