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6일 멕시코 국경을 출발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을 타고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지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156일 만인 지난 10월8일에 종주를 끝냈다. 걸었던 거리는 2,653마일(4,270km). 출발 당시 150파운드가 넘던 몸무게가 120파운드로 줄어 있었다.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30여 파운드의 수퍼 다이어트가 자연스레 이뤄진 것이다.
PCT를 종주한 뒤 다시 일상생활에 적응 중인 유희재(45) 씨를 지난주에 만났다. 도로 15파운드가 쪘다고 하는데 날씬했다.
그는 지난해 맘모스에 갔다가 타고 가던 버스가 자칫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질 뻔한 아찔한 경험을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자’고 그때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던 PCT 종주 준비에 들어갔다. 마침 리스가 끝난 차는 반납하고, 살던 방은 뺐다. 직장? 다녀와서 다시 잡으면 되고, 부양가족이 없는 싱글이어서 홀가분했다. LA의 한인 마라톤클럽 KART의 회원인 그는 마라톤을 한 지는 10년이 됐으나 산을 따로 가본 적은 없다고 한다. 유튜브 등을 보고 장비를 갖추면서,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신발도 등산화 대신 편한 트레일 러닝화를 신고 갔다. 해어지고, 찢어지는 바람에 5켤레를 갈아 신어야 했다.
샌디에고 남동쪽 캄포를 출발해 사막을 지나 산악지대에 접어들자 5월인데도 비에다 눈까지 내렸다. 출발 20여일 만에 빅베어 인근에서 강풍을 만나 텐트 한 동을 해먹었다. 새 텐트와 침낭과 옷도 두꺼운 것으로 보급받아야 했다.
한 달여 뒤 테하차피(566마일)에 도착했으나 더 이상 진행은 무리였다. 눈 때문이었다. 시에라 구간은 눈이 녹는 여름으로 미룬 채, 렌트카를 해 캘리포니아 접경에 있는 오리건, 애쉴랜드로 건너뛰었다. 나중에 보니 잘한 결정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올해 안에 PCT 종주는 불가능했다.
1,718마일 지점에서 다시 산으로 들어가 95일째인 8월8일 종착점인 캐나다 국경 매닝 팍에 도착했다. 그 후 다시 애쉴랜드로 되돌아와 남행을 시작, 마침내 PCT 종주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종주 중에 하루 40마일 이상을 걸은 날도 있었다. 내리막은 거의 뛰다시피 했다고 한다. 북가주에서는 잠을 자지 않는 무박 산행에 도전해 하루 63마일을 걷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나자 몸이 산에 맞춰졌고, 살이 빠지면서 마른 근육질의 산사람이 된 것이다.
힘든 것은 추위와 바람, 모기였다고 한다. 넘어져 다치기도 하고, 목감기로 어려움도 겪었다. 장기 산행의 성공여부는 짐의 무게. 페트병을 물병으로 쓰고, 반바지에 방풍복 정도로 옷도 최대한 줄였지만 보통 30~40파운드를 지고 다녀야 했다. 식량은 최대 열흘 치를 지고 가면서 떨어지면 인근 마을로 나가 오트밀, 라면, 빵, 초컬릿 등을 조달했다.
PCT 종주를 할 때 쉬는 날은 ‘제로 데이’라고 한다. 그는 매번 바쁜 제로 데이를 보냈다. 유튜브 영상 편집 때문이었다. ‘라일로 360’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운행 중에 찍은 PCT 종주기를 유튜브에 올렸다. 지금까지 27편을 올렸고, 앞으로 10여 편을 더 올릴 계획이다. ‘슝슝TV PCT’ 를 치면 볼 수 있다. 그 긴 산길을 어떤 생각을 하며 걸었는지, 동영상에 나오는 혼잣말을 들으면 엿볼 수 있다.
PCT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요즘은 한국 등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생의 모멘텀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인데 혼자가 많았다. 혼자 걸어야 모든 것에 열려있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PCT는 혼자 갔어도 혼자 걸은 길은 아니었다.
어느 산골 카페는 PCT 퍼밋만 보여주면 파이와 음료를 무료로 제공했다. 히치 하이킹으로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졌다. 트레일 곳곳에는 누군가 아이스박스 등에다 물과 음료, 스낵 등을 채워 놓았다. 백 패커들은 이를 ‘트레일 매직’이라고 불렀다. ‘트레일 앤젤’도 있었다. 연락을 하면 나타나 집으로 데려가 더운 음식과 샤워, 잠자리도 내줬다. 앤젤 중에는 한인도 여럿 있었다.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지만 위로도 사람으로부터 왔다.
트레일 네임이 니오(Neo)인 유희재 씨는 PCT 종주는 삶의 우선순위 문제였다고 했다.
미니멀 라이프를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 내년에는 한 달여 일정으로 산티아고 길을 걸을 계획이다. 몸이 받쳐 주는 한 자유혼으로 살겠다는 말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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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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