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가을 속에 깊이 침잠하며 책을 읽고 싶었다. 첼로의 나지막한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더러 시간을 잊기도 하고, 가끔은 귀뚜라미의 노래를 들으며 미명의 새벽을 맞이하게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난 두어 달을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에 매달려 살았다. 처음에는 그 동안의 수많은 다른 뉴스들처럼, 며칠 지나면 소멸되는 여느 태풍처럼, 그렇게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름날의 지루한 저기압처럼, 사그라질 기미가 없이 날마다 새로운 소식을 업데이트 해 가며 미디어를 점령해 갔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또 거짓인지는 이미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SNS에서조차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에 합당한 뉴스만을 공유하며 편을 가르고, 두 광장의 큰 목소리는 침묵하는 이들의 소리없는 외침조차 자신들의 편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함께 사는 몹시 슬픈 나라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시간만 나면 책 대신 한국 신문을 펼쳐 놓고 쓰여지지 못한 행간의 의미까지 읽으려 애쓰고 있는 나를 보았다. 이미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들과 함께 분노하고, 내가 생각하는 정의의 편으로 서서히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가을은 천천히 왔고 빠르게 지나갔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빗소리가 가을을 떠나보내기 위한 진혼곡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밤, 가을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바람을 따라 숲으로 떠났으나, 텅 빈 숲에는 잎을 놓아버린 나무의 밑둥만이 도드라져 보일 뿐이었다. 가을이 가버렸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쩌면 그 빈 숲이 곧 가을이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비우기를 나무처럼 해야겠다고, 책에서 본 그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려 보지만 욕심껏 움켜진 두 손을 펼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다. 완벽할 수 없는 까닭에 처음부터 온전히 비울 수 없는 거라고, 스스로 변명을 하면서도 지나온 세월에 대한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몫이다. 어쩌면 손에 쥔 것이 마지막 미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마저 내려 놓는다면 무슨 힘으로 버티고 살아갈지 두렵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이 계절은 그 민낯마저 드러내며 말을 건다.
카페 창가에 앉아 밖을 보니 거리의 사람들이 느린 그림처럼 움직였다. 앞서 가는 젊은 연인이 마주보며 영화의 주인공처럼 웃는다. 그 뒤를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노인이 그의 아내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가을 속에서는 젊은이에게도,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도 같은 색깔의 풍경이 그려진다는 것을 알겠다. 가을은 조급하지도, 외롭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하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멈추었다 천천히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을을 보내는 동안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한 겹씩 옷을 벗고 빈 가지로 겨울과 마주하는 나무를 보며 인생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두고 온 것에 대한 자책감이기도 하고, 돌아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회한이기도 하겠지만 가난한 마음에 누더기가 된 그리움이 차오르는 시간이다. 돌이켜보면 떠나온 것이 잘 한 일인지, 더 망설이며 고민했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때 무척 힘들었다고 기억된다.
내가 본 가을을 모두 글로 적을 수는 없다. 또한 누군가의 가을을 다 읽을 수도 없다. 가을은 그저 마음에 담아두면 되는 것이었다. 거칠고 모질다 여겼던 삶조차도 결국은 누군가의 등에 업혀 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처럼, 가을은 가슴 멍한 회한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아니 가슴에 깊은 회한을 품지 않고서는 가을을 제대로 볼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마감을 앞둔 원고처럼 끝내야 하는 일들이 한꺼번에 들통 나 버리는 11월이다. 코앞에 닥친 세월을 살아내느라 늘 빠듯했다. 어쩌면 시간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었는데 홀로 속을 태웠는지 모르겠다. 속도 모르는 바람이 등을 떠밀고, 먼 하늘로 기러기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지나간다. 비탈에 선 나무들이 맨 몸으로 허공에 그리는 풍경을 수묵화 그리듯 정성껏 사진에 담았다. 움츠러든 그림자 하나가 함께 찍혔다. 가을과 가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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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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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을 울리는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