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떠나는 날이다. 친정엄마와 보내는 마지막 밤. 고개는 벽을 향한 채 슬그머니 이불 속 엄마 손을 더듬어본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며칠 전부터 약속했기에 엄마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오늘 엄마의 손은 사랑이나 정 같은 느낌보다는 그저 아픔이 전해오는 손이다. 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손을 잡힌 채 아까부터 미동도 없다. 말없이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어 본다. 이 손을 놓으면 다시 잡을 수 있을지, 아흔이라는 엄마 나이를 의식하면 ‘다음에’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새벽까지 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다. 잠결에도 잡은 손 놓지 말아야지 하던 기억이 나는데 속절없이 찾아온 아침에 우리 손은 맥없이 풀려 있었고 우리는 또 한 번 이별을 해야 했다.
그렇게 내 손을 잡았다가 놓은 손을 생각한다. 늦게 퇴근하여, 잠든 아기의 앙증맞고 말캉거리는 손을 가만히 쥐면 가슴 벅차면서도 먹먹했다. 장거리 통근하며 직장에 다니는 내 손은 아기에게 늘 미안했다. 방에 들어서는 제 엄마 얼굴만 보여도 동그랗게 웃으며 내밀던 손. 쥐어보는 것도 아깝던 손인데 언제 내게서 빠져나갔을까.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 손가락이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손을 잡는 일도 드물어졌다. 얼굴 보기도 어렵던 대학시절을 마치는가 싶더니 어느 가을날, 햇볕 내려앉는 공원에서 그 손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아들의 손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제 아빠 손만큼이나 커져있었고 뼈마디가 굵어져 제법 듬직해 보였다. 나는 아들 손에 들어있는 며느리의 하얀 손을 바라보며,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지나가버린 듯한 세월을 느껴야 했다.
세상에서 제일 크던 손을 기억한다. 바위도 쥐고 흔들 것 같던 아버지의 손. 어릴 때 그 손은 못할 게 없는 만능 손이었다. 힘이 나오고 돈이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한 손으로는 잡지 못해 두 손으로 감싸서 잡던 촉감이 선명한데, 어느 시점부터 우리 손은 같이 늙어갔다. 결혼하고 주부로 교사로, 시간을 다투는 일상에 밀려 아버지 손을 잡기는커녕 바라볼 기회마저 드물었다.
세월은 흘렀고 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내 나이 마흔 몇에 잡아본 아버지 손, 언제 살이 빠졌는지 힘없이 밀리는 손등을 말없이 어루만지던 시간을 나는 기억한다. 이민 오기 며칠 전이었다. 아버지 옆에 앉아있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 떨어졌고 그걸 감추려고 허둥거리다 엉겁결에 잡은 손. 언제까지나 크고 듬직할 것 같던 그 손은, 맏딸의 무심함을 탓하려는지 온기를 잃은 힘줄과 거죽만 남은 듯했다. 아버지도 내 속내를 읽었는지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았고 나는 잡은 손을 어쩌지 못한 채 천장만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이민 온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자리에 누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배편으로 온 이삿짐을 정리하기도 전에 아버지를 만나러 날아갔다. 모든 게 내가 이민을 왔기 때문이라는 자책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두 달 반 동안 병실에서 불안한 시간을 보내다가, 죽음의 그림자가 두려워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때쯤 나는 그 손을 영영 놓아야 했다.
삶이란 이렇게 차례로 손을 놓고 놓다가 떠나는 것이겠구나. 만나서 반갑다며 잡은 손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떠난다고 손을 내밀던 이들. 많은 얼굴이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이별하는 내 손을 마지막으로 잡아주는 사람이 남편이 아니면 좋겠다. 떠나는 그의 손을 내가 잡아주고 싶다. 아내의 손을 잡고 평온하게 떠날 수 있도록 배웅한다면, 만일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면, 그가 원하는 아내로 살지 못한 미안함을 조금은 덜 것 같아서다.
흐르지 않을 것 같던 마딘 시간도 어김없이 지나, 내 아들이 아기였을 때보다 더 여리게 느껴지는 고사리 손을 선물처럼 받았다. 내 아들의 아들, 두 손자의 손이다. 작은 손가락을 움직여 우리 부부의 손을 잡을 때면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잊은 듯, 아니 다 얻은 듯한 표정이 되곤 한다.
손자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끝에 서 있는 삶의 허무마저 잊게 해주는 존재다. 인생의 저물녘에 온전히 흔흔할 수 있는 시간은 두 손자를 품에 안고 있을 때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시간에 눌려 조금씩 주저앉는 나를, 그리고 우리 부부를, 오늘도 고 여린 손들이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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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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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속절없음을 보여주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