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6월, 구리광산 재벌 2세이며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인 윌리엄 앤드루스 클락이 로스앤젤레스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설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LA 인구는 50만명, 이미 LA심포니오케스트라가 활동하고 있었으나 실력이 형편없었고, 단원들은 다른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수준이었다.
클락은 처음부터 일류 오케스트라를 꿈꿨다. 연주자들이 다른 잡을 뛰지 않아도 되는 연봉을 보장하고, 다양한 레퍼토리와 최고 수준의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관현악단, 뉴욕 시카고 보스턴 필라델피아에 못지않은 정상급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경비를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아낌없이 지원했다. 15년 후 57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오케스트라 운영에 보탠 돈은 매년 20만달러씩 총 300만달러, 대공황이 겹친 시기에 미국의 다른 오케스트라들은 상상도 못할 큰 기부였다.
클락은 초대 음악감독으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를 초청했으나 그가 거절하자 월터 헨리 로스웰을 음악감독으로 영입했다. 구스타프 말러에게서 작곡과 지휘를 배운 로스웰은 뉴욕에서 실력있는 연주자들을 바삐 스카웃했고 짐 가방에 악보를 잔뜩 싣고는 9월26일 LA에 도착했다. 모자라는 단원들은 LA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데려다 급하게 오케스트라를 조직한 것이 10월 중순, 그리고 단 11일 동안 연습하여 1919년 10월24일 첫 연주회를 가졌다. LA 필하모닉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8가와 그랜드 애비뉴에 있는 트리니티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첫 콘서트의 입장료는 50센트~1.50달러, 프로그램은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베버의 오페라 ‘오베론’ 서곡, 리스트의 교향시 3번 ‘전주곡’, 샤브리에의 스페인 광시곡이었다. 연주는 대성공이었고 LA타임스를 비롯한 로컬 신문들은 이 지역 음악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며 호평을 보냈다.
그렇게 탄생한 LA필은 클락과 로스웰의 열정에 힘입어 처음부터 연주수준이 괜찮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다 8년 만에 로스웰이 갑자기 타계했고, 이후 총 10명의 지휘자가 LA필을 이끌어왔다. 게오르그 슈네보이트, 아르투르 로진스키, 오토 클렘페러, 알프레드 월렌스타인,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 주빈 메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앙드레 프레빈, 에사 페카 살로넨, 그리고 현 음악 및 예술감독 구스타보 두다멜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생존해있는 3인-주빈 메타(83), 에사 페카 살로넨(61), 구스타보 두다멜(38)이 한 무대에 오른 특별한 공연이 지난 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LA필의 첫 공연이 있던 날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2019년 10월24일의 센테니얼 갈라 콘서트, 작년 9월 야심차게 시작된 100주년 시즌의 정점을 찍은 100세 생일잔치였다.
3인의 지휘자는 LA필을 각 시기마다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이다. 전임자들과는 달리 발탁 당시 모두 변방에서 온 무명의 신인이었던 이들은 LA필을 통해 세계적인 지휘자로 도약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최연소 26세에 부임한 인도 출신의 메타(83)는 1962년부터 15년간 LA필을 정열적으로 이끈 후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핀란드 출신의 살로넨(61)은 34세이던 1992년 부임해 17년간 LA필을 혁신적으로 발전시킨 후 런던 필하모니아 수석지휘자 겸 음악자문이 되었고 다음 시즌부터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하게 된다. 10년전 28세때 LA에 온 두다멜(38)은 변방 중의 변방 베네주엘라 출신이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거장의 한사람이 되어있다.
세 마에스트로가 출연한 전무후무한 공연의 밤, LA필과 패트론, 청중은 모두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들은 먼저 자신과 LA필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을 각각 연주한 후 마지막 무대에 셋이 함께 올랐다. 이 날을 위해 LA필이 젊은 아이슬란드 작곡가 다니엘 비야르나손에게 위촉한 3인의 지휘자를 위한 신곡 ‘우주에서 지구를 보았다’(From Space I Saw Earth)의 세계초연 무대였다.
오케스트라가 넓게 펼쳐진 가운데 포디엄이 세 곳에 세워졌다. 두다멜이 맨 앞에서 현악파트를 지휘하고, 중심부에서 양쪽으로 나뉘어 포진한 목관 금관 타악기를 메타와 살로넨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지휘했다. 음악은 각자 가다가 하나로 모이기를 반복했고, 마디에서마다 세 거장이 서로 돌아보고 조율하며 함께 지휘하는 모습은 가슴 뭉클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우주와 지구생명과 미래의 사이클이 입체적인 빛의 입자로 반짝이던 특별한 사운드, 100년의 시간과 음악이 차곡차곡 쌓여서 내는 소리였다.
다시 100년 후, 2119년 10월24일에 열릴 200세 생일 콘서트에서는 어떤 음악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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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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